신새벽 시인 / 피아노의 숲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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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새벽 시인 / 피아노의 숲
흰 건반에 손가락을 얹자 바스락 소리가 난다
목이 타들어간다 습기를 잃어버린 까슬까슬한 폐허 초록 손톱을 가졌던 키 큰 나무들의 유적지 세포 속에 들어앉았던 비명들이 발기하고 말라비틀어진 음표 사이로 먼지들이 일어선다
연주, 할 수 있나요
움푹 도려내진 낮달이 앙상한 배를 움켜잡고 굶주린 악보를 던지고 있다 낡고 버려진 소리들로 삐걱 거린다
귀를 막아보지만 닳고 뭉툭해진 감정들이 파랗게 질려 쇄골에 내려앉았다
황홀한 장르는 오래전에 사라진 곳 끊어진 소리는 언제 쯤 이어질까 쓸쓸하고 외로운 긴 손가락
검은 기억들이 파편이 되어 흩어진 숲
-2023년 <애지> 봄호 신작시
신새벽 시인 / 느시*
눈앞에 펄럭이는 유인물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빗장을 풀었다 내장되었던 나의 역사가 우르르 쏟아진다
내 몸 어디쯤에서 사라진 상처들이 불현듯 떠오르고 혀에 돋은 말들이 비명이 되었다
들춰 보면 후회의 바늘이 나를 찌른다
스티커처럼 달라붙은 이력들 꼬리를 감춘 페이지엔 삭지 않은 침묵으로 무너져버린 가벼운 인연들이 즐비하다
진열된 아픔들로 살갗이 따가워진다
증거물의 난간이 점차 무너지고 울컥한 고백서書앞에 축축한 몸을 눕힌다
-시집 『파랑 아카이브』에서
신새벽 시인 / 투명을 바라보는 방식 날아오르는 빗방울을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동그란 언어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기포들 이명을 앓는 당신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면서 하늘을 등에 업은 유리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방울을 날린다
찰나와 윤곽을 유지하는 시간 앞에서 당신은 뛸 듯이 기뻐하고 난 허망을 품는 허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떠 있는 호흡들, 문득 우리 사이는 온전하지 않다는 생각
환한 오후를 떠다니는 당신과 나 아슬아슬, 위태롭게 서로를 밀고 당긴다
투명한 벽엔 늘 금들이 그어진다
지름을 재보기도 전 원圓들이 떠돌다 사라지고 아무도 만질 수 없는 뼈 자국들이 즐비하다 굳이 지우지 않아도 되는 흔적들
비눗방울 좀 그만 날리라는 질책이 입속에서만 맴돈다
멀미 너울처럼 넘나드는 유리 공간에 난 중력을 끌어안은 거품이 되어간다 -빈터문학회지
신새벽 시인 / 소금문자
바다의 영혼들이 유서를 써놓았나 아득하게 넓은 소금호수* 나의 눈은 재빠르게 수평선의 끝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놓치고 만다
마치 이승과 저승의 건널목에 미아가 되어버린 듯 몽롱한 현기증에 휘청 거린다 빗금을 그으며 달려오는 햇살이 눈을 찌르고 초점을 잃어 바닥을 향하지만 유서의 문장을 읽을 수가 없다
바람의 살점이 떨어지고 해의 갈비뼈가 으스러져 만든 흰 뼛가루 같은 소금밭
무디었던 발바닥에 사각의 귀가 분질러지는 아픔 해체되어지는 문자들이 발가락 사이로 끼어들어 채 아물지 않은 상처로 쓰리다 왈칵 옆구리에 달라붙어있던 슬픔이 목울대를 건드린다
소금 낱장의 빈칸이 얕은 물 사이를 일렁이고 당신과의 행간이 아득해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슬프도록 짜디짠 문장을 읽으려 눈을 부빈다
* 터키에 있는 소금호수
신새벽 시인 / 말 걸지 마세요, 낯설음을 견디는 중입니다
Close, 작은 팻말이 걸려있는 가게 문틈 사이를 들여다봐요
입고 싶은 꽃무늬 원피스가 걸려있고 난 맨발이예요 누구의 흔적도 아닌 흔적들이 통증처럼 흔들리고 있어요
고체 같은 어둠속에 뒷걸음치다 만난 푸른 새벽
접힌 발자국을 따라 읽을 줄 모르는 단어를 그려요 페이지가 늘어나고 얇아진 귀는 당신을 기다려 보지만 새들의 울음소리만 날카로워요
잘려나간 고백들이 떠다니는 습지 위로가 되는 툰드라의 백조의 희디흰 깃털 하나가 날아올라요 습기 가득했던 입술이 말라가고 약속이 깨진 조개껍질 속으로 푸치니의 음악이 스며들어 아픔을 다독이고 있어요
까만 재가 된 당신의 편지는 유리병 안에서 숨을 쉬고 있어요
잊고 있었던 서랍 속 립스틱을 바르고 노을이 온몸으로 스며들 때 까지 강가에 누워 당신의 발자국 기다려요
신새벽 시인 / 오늘의 숲 네모 안에 갇혀 있던 시간 눈앞엔 늘 물결처럼 흐르는 정보를 채집하기에 바쁘고 난 열꽃을 피우며 그물 안에서 출렁거린다
함께라는 단어는 올가미
푸르른 서슬은 늘 우리를 겨냥하고 있다 모르는 당신, 섭섭한 남자, 바다를 향하는 달리는 여자 뒷걸음질하는 이름만 무수하다
숲이 보내오는 파동의 무늬로 피륙을 짜보려는 시도 어쩌다가 아닌 오랫동안
낯선 주파수가 흐르는 안식처는 숲이다
저편… 공허를 안고 있는 나무들이 마치 검은 사제복을 입은 듯 겸허히 두 손을 모으고 서 있고 난 그들을 향해 친절한 인사를 한다
신새벽 시인 / 재배치된 풍경
다리 사이로 엉기어 치근대는 치마 안감 같은 아침
오늘 정전기는 유독 기승을 부리고 여자는 들뜬 화장이 불만이다 기분 나쁜 주술을 가득 머금은 구름이 엉클어진 머리를 잡아당기고 잠의 뒷덜미에 부여 잡혀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물컹한 것들을 이팝나무 아래 붉은 쌀밥을 쏟아놓는다
눈물과 젖은 입술을 훔친다
흑백의 정수리에 악필로 써놓은 소문들이 밤사이 먹물처럼 번진 것이다
여자는 추락을 두려워했다
휘어진 손가락을 닮은 산이 제각각 다른 온도로 바뀌어도 떠난 걸음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오체투지로 코를 박고 엎드려 있는 시간을 믿었다
미아가 되어버린 시간
위로가 되었던 키 큰 나무들조차 행간을 밀착시키며 수근거리고 누군가가 복제한 어제의 풍경이 낯 뜨겁게 등을 돌린다
여자를 관찰하는 눈빛이 그늘에 숨어 눈을 반짝이고 소문과 소문의 숙주들이 발광하고 있다
-계간 『열린 시학』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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