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 시인 / 붉은 소문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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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 시인 / 붉은 소문
미쳐버린 딸 이야기가 그렇고 집 나간 벙어리 아들이 그렇고 곱사등이 어미가 만지다 간 찬장 속의 소문들 또한 그렇고,
그렇게 빈집보다 더 오래 살아서
그들끼리 다리가 엉키고 배가 붙어 새끼를 낳고 살림을 차리고 키득키득 입을 막고 키득키득 귀를 핥아서,
가랑이로 숭숭 붉은 그늘이나 흘려서
여름 저녁은 참으로 끈끈해져가고
이향 시인 / 만개
뭔가에 몰입한 듯 홀린 듯, 멈출 수 없이 피는 목련은 무슨 일이 일어날 암시 같다 소리란 소리 다 빨아먹고 벌어질 대로 벌어져 흰 그림자만 돌아다니는 골목 무언가 부추기기라도 하는지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싶어 안달 난 꽃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의 눈동자처럼 피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누군가 꼭 미쳐나가 버릴 것 같은데 누군가 한 명은 저 흰 그늘에 목이라도 매달 것 같은데 적막 속으로 하얗게 몰아가는 태풍의 눈처럼, 필수록 팽팽해지는 골목 꽃이 전속력으로 밀어 붙이고 있다
이향 시인 / 접시는 매일 조심한다
깨뜨리고 싶은 순간에 접시를 닦았다 서럽지 않은 시간은 어디에도 없다고 둥근 접시를 식탁 위에 깔아보곤 했다
금 가지 않는 관계가 어디 있는지 너는 아니?
간혹 비가 쏟아져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괜찮아, 젖은 내 심장 위로 차곡차곡 쌓을 수 있어서
접시는 안심이다
이렇게 얇은 관계를 가지려고 새벽은 창가에 서 있었지
당신의 흰 손가락과 눈빛과 음성을
접시는 매일 조심한다
떨리는 손으로 찬장 속의 접시를 꺼내 보던 시간이 두꺼워지고 있다
처음부터 사랑은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와장창 깨져 버렸으면 좋겠어 계단처럼, 난간처럼
사랑은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졌지
원형이거나 사각이거나 혹은 타원형
테두리 같은 건 이미 없었는데
아직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랑을 모으고 있다
이향 시인 / 목련
문가에 몰입한 듯, 홀린 듯, 멈출 수 없이 꽃이 피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암시 같이 소리란 소리 다 빨아먹고 벌어질 대로 벌어져 흰 그림자만 돌아다니는 골목,
무언가 부추기기라도 하는지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싶어 안달난 꽃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의 눈동자처럼 피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꼭 누군가 미쳐나가 버릴 것 같은데 누군가 한 명은 흰 그늘에 목이라도 매달 것 같은데 태풍의 눈처럼 몰아가는 저 환한 적막,
이향 시인 / 엔딩 크레딧
혼자 걸었다 혼자 밥을 먹었다 혼자 말을 건넸다
살아남기 위해 자주 혼자가 되었다
유리문 안으로
유리문 밖으로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무리들
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저들은 뭉쳐야 하는 걸까
때로는 저 안을 기웃거릴 때가 있다
낮아진 지붕은 보이지 않는 창을 가졌다
가파른 곳에서야 겨우 밤과 눈이 마주쳤다
흰 눈동자가 핏발을 터뜨리며 누구도 관심 없는 말들을 견디고 있다
나의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걸었다
영화 속으로 올라가는 자막들처럼
나를 알아차리기도 전
어느새 또 혼자가 되었다
-월간 《시인동네> (2020년 5월호)
이향 시인 / 사과
간혹 몸이 아풀 때는 마음이 어디에 가 붙고 싶다는 것일까 내 이마 짚어주는 당신의, 내 팔다리 주물러주는 당신의, 내 머리카락 쓰다듬어주는 당신의 손끝에 나는 매달려 있다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몸이 아프면 슬쩍 그것에 달라붙어 당신 손을 잡고, 그 어깨에 기대 밥숟가락을 받아먹고 싶다 사랑한다고 사랑받고 싶다고 말은 못해 무슨 병이라도 옮겨주고는 곧 떨어져 버릴 듯이 사과는 달려 있다
이향 시인 / 새들은 북극으로 날아간다
강 건너 쌍림공단 쪽에서 깃털에 따스함을 숨기고 쇠기러기 한 떼가 북국으로 날아간다 뭉텅뭉텅 욕설 게워내는 굴뚝 위로 폭설이 내려 세상의 길들 질척거린다 눈발에 못이긴 나무들 길게 휘어지고 섬유공장 연사실 대낮에도 알전구가 껌벅거린다 서른 두 살의 조선족 김금화 씨는 귀마개 꽁꽁 틀어막아도 눈 내리는 소리 들린다 윙윙대는 기계소리가 푸른 뽕잎 갉아먹고 다급하게 실 토해내어 고치를 만든다 고치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수천마리 나비가 되어 꿈속을 날아다닌다 몰래 숨겨둔 적금통장에는 삼만 원 미만의 싸락눈이 하얗게 쌓인다 두고 온 북국 눈발에 파묻힌 무도 연초록 싹 내밀어 봄을 기다리겠지 막내의 바짓단도 겨울해만큼 짧아졌는지 더 자랄데 없어 서걱이는 강둑의 갈대가 그리움에 얼굴 묻고 우는 저녁 젖몸살로 뒤척이다 뱉아놓은 보랏빛 한숨 한 가닥 물고 북국으로 날아가는 저 쇠기러기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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