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종연 시인(서울) / 아프리카 부처님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0. 08:00
김종연 시인(서울) / 아프리카 부처님

김종연 시인(서울) / 아프리카 부처님

 

 

볕에 탄 얼굴에서 아프리카를 떠올리고

뜻 모를 염불 소리에서 부처님을 떠올린

여덟 살 아이의 상상력이 탄생시킨 그 남자

 

팔순의 아버지 대신 들녘의 보모였던

그 남자의 일요일엔 휴식이 없었다

물길을 열고 닫으며 생명을 키워냈다

 

노부가 떠난 뒤에도 그의 삶은 그대로다

일과를 마친 후 합장의 시간은 늘고

아이는 청년이 됐다 들을 닮아 푸르른

 

-시집 『아프리카 부처님』, 알토란북스, 2021

 

 


 

 

김종연 시인(서울) / 영원향

 

당신이 할 수 없는 모든 걸 제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먼저 보여주세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산악 열차를 타고 멀리 떠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과일을 돌려 깎으면서 그것이 생각을 묶을 리본이 될 때까지.

 

가능하지 않은 걸 모두 실행하면서.

실패한 실험을 모두 기록해서 네게 보여주려고.

 

그분은 저보다 이걸 더 사랑했어요. 어서 가져가시고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도 그들과 같다.

황금빛 보리를 헤치고 한 무리 사람들이 구시대에서 도망치고 있다.

 

지퍼가 닫히고 나면 바지는 다시 잠잠하다.

잠잠한 사이 바지는 생각한다.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눈앞의 이미지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고 있다.

눈과 코와 입이 같고 눈과 코와 입이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차이점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겨울 수축과 여름 팽창의 마음으로 심장이 뛰고 있다.

 

기다리던 것이 눈앞에 멈춰 서서 문을 열고 기다려줄 때

그 마음은 마지막으로 남은 복사본이고

 

이 마음은 삭제된 원본이야.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야.

우리는 오픈 소스고 이 세상에 동시에 업로드 되었지.

우리의 소프트웨어를 누구나 개량하고 재배포가 가능하도록

 

슬픔이 아름답고 예뻐서 자꾸 생각이 나게.

그것은 고통이 몸을 포기할 때까지의 수동성.

 

능동성은 지금 나를 벗어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

 

나는 네가 구성한 알고리즘이야.

우리는 연산되고 있는 과정에 있고 이제 결과가 도출될 차례.

 

내가 못 견디는 건 나의 사랑이지 너에 대한 사랑이 아니에요.

 

장노출로 찍은 네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동안 너의 어딘가는 슬퍼한다.

우리는 이 필름을 똑같이 나눠가지기로 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나면 이 모든 이미지에도 밤이 찾아오고

 

스크린의 물성이 빛과 혼합되고 있다.

 

​-[제23회 박인환 문학상 수상작]-

 

 


 

 

김종연 시인(서울) / 비유 없이 사랑하기

깨진 유리잔에 물을 담아 두는 스테인드글라스.

색과 무늬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빛의 물질.

녹지 않는 얼음은 뜨거운 것의 이미지.

열려 있는 소파의 센티멘털이 숨겨둔 접시와 포크.

창가가 숨기지 않는 추락.

가장 높은 곳에 이름을 올려두는 샐러드,

붉게 동그라미를 쳐둔 봉투에 남은 아침과 점심.

서랍마다 가득 찬 이미지의 리스트.

끝에 가서 폭탄이 되는 폭죽,

멀리서 바라볼수록 커지는 원근법.

무안측에 칼을 넣어 뼈를 퉁기는 실내악.

인간의 소규모 사랑.

암전의 사이사이 소리를 지르고 주저앉아 절망하는 인간이 그려진 회화.

이전이 없는 세계. 예정한 것을 이루는 법칙.

노크하는 붉은 무리. 젖지 않는 점묘화.

멀리서 보면 사람인 것.

가까이서 보면 그려지고 있는 것.

동굴을 그리고 그 안에 동물과 식물을 데려다주는 것.

개체가 종을 대표하는 멸종.

뼈도 남기지 않는 사랑.

정체 중인 터널.

오차 범위 안에 있는 몸.

슬프고 뜨거운 것의 이미지 되어주기.

입안에서 끓는 모래를 뱉지 않고 견디기.

올리브 나무와 해변의 사랑,

난반사되는 상이 다른 거울을 마주하게 될 확률.

좁힐수록 멀어지는 거리의 건축.

잡히는 물성을 가져서 슬픈 손.

차에서 향이 모두 날아갈 때까지 창가를 바라보는 사람.

맨발에 꼭 맞는 양말. 키를 재는 선분.

씹지 않아도 삼킬 수 있는 유리.

아름다운 가족.

비워두는 이미지,

다음에 하는 사랑.

날도 푹한데 나가서 좀 걷고 들어오지?

 

 


 

 

김종연 시인(서울) / 월드

 

 

 너는 이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너와 어울리는 사회를 지어 줄 참이다.

 걱정하지 마라.

 모든 일은 잘될 것이고, 잘되지 않은 일도 너의 탓이 아니니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늦게까지 하고 싶은 것 하고, 보고 싶은 것 보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듣고 싶은 말 듣는 것.

 

 그리고 느지막이 일어나

 커튼을 걷고 날씨를 확인하고 조금 더 잠을 잘지 아니면 일어나 밥을 먹거나 티브이부터 틀지 고민하다가

 

 언제든 잘 수 있으니

 밤을 새워도 괜찮아. 하루 이들쯤 안 자는 것도 좋아.

 

 너는 이렇게 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너의 가능성은 세상을 뒤흔들만한 재능도 가지고 있다.

 

 조급해하지 마라.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으니 그때를 기다려라.

 그때가 오면 너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니 불안해하지않아도 된다.

 

 너의 불안은 너를 갉아먹을 뿐이다.

 불안의 먹이가 되지 않고 애완하고 싶다면 네 손으로 불안에게 먹이를 주어라

 네가 가진 것 중에 나누어도 될 만한 걸 던져 주어라.

 

 그래도 괜찮다.

 

 아프면 병원에 가라. 병원은 너의 아픔을 기다리는 곳이다. 네가 가지 않으면 그곳은 의미가 없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언제나 너부터 생각해라. 네가 있어야 모든 게 있다.

 네가 너를 챙기고 보살피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너를 방관하는 것이야말로 배타적인 것이다.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라.

 결국 모두 가지게 될 것이니 시간문제일 뿐이다.

 

 웃을 일을 자주 만들어라. 그러나 웃기지 않을 땐 웃지 않아도 된다.

 울 일은 만들지 말고, 울고 싶을 땐 곧바로 울어라.

 울지 않으면 의심하고 냉소하게 된다.

 

 이 사회는 너를 위해 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네가 주인이고 손님이다.

 네가 네게 대접하고 대접받는다.

 

 최선을 다하면 두 배로 행복을 누린다.

 

 사랑에 겁먹지 마라.

 사랑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하룻밤만 아프고 나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별을 보는 동안

 별이 그 자리에 있듯이

 

 너를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너를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너를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이 사랑을 멈출 수가 없구나.

 

-시집 <월드> 중에서

 

 


 

 

김종연 시인(서울) / 웨스트월드

 

 

비인간

부질없는 찬란

 

쓰러지고 싶은 몸을 붙드는 잔인.

감각보다 중요한 감.

불행하지 않다는 끈질긴 집착,

 

외투와 기억.

지하의 숙취

 

이 땅에 꽃 피우는 어둠.

누구도 흘려 본 적 없는 피.

누구의 고통에도 내어 주지 않는 향기. 제향에 질식해 죽는 꽃.

 

너른 들판에 널려 있는 무용.

죽음의 속옷 같은 삶 같은 무언가

화려할수록 촌스러워지는 거리

 

소리를 지르지 않는 고결한 인간.

이데아를 아이디어로 읽고 실실 웃는 비루

 

그것은 아무것

아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아프기 전으로 돌아가는 건강

연대하는 과거

 

사람에게 목줄을 맨 말뚝. 최선을 다해 그리는 원. 중심을향해 점점 작아지는 원.

 

과년 파문. 나이테 지문, 자성

 

풀리는 다리. 처지는 어깨.

볼품없는 늙음.

시간 한가운데로의 도피.

 

사람 안에서의 해방.

무의미

 

이교의 배임.

타생의 방종.

 

인간이 사라진 동물원에 초식하는 동물 한 쌍.

어찌할 수 없는 서로를 죽도록 원망하고 저주.

 

거짓의 진심.

진심의 거짓

 

모두 무너뜨릴 때까지.

 

인간.

 

-시집 <월드> 중에서

 

 


 

 

김종연 시인(서울) / 흑백

 

 

좋은 시절을 생각하면 용서가 쉬웠다

 

자다 깨어보면 창틀에 크고 검은빛이 앉아 있던 시절

새도 아니고 신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눈 비비고 다시 보면 사라지고 없는

 

나는 그것이 좋아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죽은 외할머니라고도 믿고 일 년 전 죽은 강아지라고도 믿어 보고

 

내가 잠든 동안 잠시 나와 있는 내 영혼이라고도 믿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나? 내가 어떻게 되면 너는 어떻게 되니?

물으면 너는 이제 어떻게 되니? 네가 어떻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나? 대답하는

 

그럴 때면 나는 자꾸 실없는 사람 생각만 나

이럴 때면 나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아

 

잊고 싶지만 기억나지도 않는 일들 - 그 두려운 기시감 안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입었는지, 어디에 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두 잊고 그저 거기 왜 있었는지만 잊지 않으면, 그것만 잊지 않았더라면 행복했을

 

만약

 

가본 적도 없는

 

삶에서 가져버린 죄책감 때문에 깨어 있는 날보다 잠들어 있는 날이 더 많아 꿈에서 내내 중얼거리던 목소리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는지 묻고 싶었지만 여기서 나 아닌 누군가 대답할까 두려웠다

 

훌륭한 선생들은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다 겪어봤다는듯 이야기하곤 했지만 동물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 천국이 좋은 기억에 다시 사는 거라면 지옥이 나쁜 기억에 다시 사는 거라면 나의 지옥은 나쁜 천국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하다 보면 다시 잠이 오고

 

조금 전의 세상과 지금이 손을 잡고 무너지는 동안 조금만 버티면 오는 세상이 지금 오고 있는데

 

자꾸 눈이 감기고

 

나는 지금 네게 가까워지고 싶다......

네게 가까워지고 싶다......

 

또 중얼거리고 대답은 바라지 않고

새도 아니고 신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눈 비비고 다시 보면 사라지고 없는 나의 검은 빛 나의 영혼 나의 희망

 

이런 걸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났다

 

앞으로 일어날 일 앞에서 좋은 시절을 생각하면 용서가 쉬웠다

 

- <시인동네> 2018년 6월호

 

 


 

 

김종연 시인(서울) / 불문율

 

 

 너는 지금 혼자 죽을 수 있겠니. 시간의 각은 자생수가 자라는 방향으로 저문다. 투신이 가진 경건함 속의 우물들. 하나의 우물을 안고 고개를 흔든다. 저 수면에는 오늘처럼 아름다운 연어의 붉은 결이 떠 다니고 있을거야. 이계에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음계가 있다. 다만 이미 적힌 음악은 모두 살아 있다. 간신히 새로 시작되는 마디를 머리칼로 쓸며 어느 고고학자의 현대적인 잠처럼 유골이 발굴되고 의미보다 빠른 음악이 유행한다. 집착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늘어간다. 유폐된 집에 동시상영관을 차려두고 두 영화의 주제가를 듣는 환자들. 시작과 끝이 모호해진 환영들. 성병으로 뭉툭한 몸을 끌고 해변으로 향하는 모습에서 세기말의 천재들이 기어 나온다. 자살 이후 고백의 어투로 비밀을 섬기는 예언자들. 모두가 예언자를 꿈꾸는 동안 부식되는 연애의 감각이 제 입으로 종말을 고한다. 우물에서는 후생과 전생이 대칭되고, 먼저 죽은 자들로부터 나의 대칭은 아직 오지 않는다. 자살한 고아가 애완고양이의 주검 위에 솔잎을 꽂고 있다.

 

-격월간 《시를사랑하는사람들》 2012, 11-12월호

 

 


 

김종연 시인(서울)

1991년 서울 출생.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2011년 ‘현대시’에 시 「혁필화를 해독하다」外 4편이 당선되어 등단. 2014년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당선. 2014년 '대산창작기금' 수상. 현재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재학. 시집 『월드』, 『검은 양 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