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아 시인(수원) / 해바라기 나침반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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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아 시인(수원) / 해바라기 나침반
구렛나루 그 사람 무척 차가운 성격이란다 그의 가슴은 냉기가 흐르고 찬바람 일으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다 한번쯤 떠돌아다니고 싶은데 방향 무시하고 물처럼 마음대로 흘러가고 싶은데 그는 변함없이 한 곳만 집중하라 한다 그 모습에서 나도 무수히 절망한다
그런 그에게도 따뜻한 가슴 있다 내게 때론 부드러운 미소 보내며 고개 흔들어 줄 때가 있다
오늘도 난 그와 함께 한쪽 방향으로만 존재한다
최정아 시인(수원) / 슬픔
느닷없이 해일 밀려드는 날이 있다 몇날 퍼내도 계속 밀려드는 물 빠져나가려 하면 할수록 몸은 무거워지고 바닥 물고기들이 진흙 뒤집어쓰고 마지막 숨을 헐떡인다 문을 밀고 밖으로 도망친다 쩍 금간 길이 입을 벌리고 삼킬 듯 째려본다 나도 길을 한참 째려본다 길이 나를 무시하고 등을 돌린다 길 위에 벌렁 누워 뙤약볕에 몸을 말린다 안에 고여 있던 물이 울컥 쏟아진다 물에서 물고기 썩은 냄새가 난다 수분이 증발되느라 경련도 일어난다 한참 후 돌아와 문을 열자 축축한 사물들이 일제히 쏘아본다 고집불통의 사물들을 밖으로 마구 집어던진다 진흙 뒤집어쓰고 찌그러지면서 구시렁거린다 해일이 빠져나간 집 축축해진 내부가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또 언제 해일이 일어날지 몰라 나는 방파제와 자주 시비를 붙는 습관이 생겼다
최정아 시인(수원) / 나를 살피고 있는 불만
한겨울에도 반바지 입고 빨간 넥타이 매고 빨간 양말 신고 뿔 달린 모자 쓰고 파안대소 웃음소리 내며 능청스레 걸어와서 하얀 드레스 입혀주며 춤추자고 허둥대며 발등 밟고 예의도 없이 불온한 눈빛 쏘는 너 너를 피해 달아나려 하면 나를 죽은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도망치려 하면 먼저 앞에 가서 지키고 있고 예의도 없이 아무 곳에 불쑥 나타나 일 그르치게 하고 신호도 무시하고 내가 들녘으로 나가자고 하면 방문 걸어 잠그고 안에만 있고 비 오면 눈물까지 찔끔거리다가 내 잠들면 방을 빠져나가 새벽녘 소주병 들고 들어와 혼곤한 잠 깨우며 다시 내 몸 더듬고
최정아 시인(수원) / 식물의 혈액형
수박을 닮은 혈액형을 가진 언니는 둥글둥글하지만 누가 건드리면 붉은 속내를 김추지 못한다 오빠는 칡뿌리 혈액형이다 한쪽 방향만 옳다고 고집부리고 등나무 혈액형인 올케언니는 오른쪽 길만 가려고 해 갈등이 심하다
골목에서 싸움대장으로 불리는 옆집 아저씨는 미치광이 들풀 혈액형이고 남동생은 환삼덩굴 혈액형이다 여동생은 자작나무 혈액형, 핏기 없는 얼굴로 오랫동안 병석을 지켰다 푸른 이파리 뒤에 숨어 얼굴 붉히는 딸아이는 토마토 혈액형이다
살랑바람에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 혈액형은 내 첫사랑이다
식물의 피는 여러 색깔이다 하얀 피를 가진 식물은 봉사 정신이 강해 누구 에게나 도움을 주는 수도사 같다 너무 쓰다고하면서 찾는 사람이 많다
엄마는 담쟁이넝쿨 혈액형이다 어떤 절벽을 만나도 주저 하지 않고 개척해 나간다 삼촌은 덩굴손의 혈액형으로 온 가족을 돌아가며 괴롭힌다 나는 들판을 품은 호박넝쿨의 혈액형을 갖고 싶었지만 꽝꽝나무 혈액형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혈액형은 겨우살이 혈액 형으로 높은 나무에서 살다 어느 겨울날 바람처럼 우리곁을 떠났다.
최정아 시인(수원) / 이슬이 사라지기까지
혼자 있을 때 나는 더 둥글어져요 여럿이 마주치면 투명해지겠지만 몸 함부로 섞을 수 없어 힘 다 빠질 때까지 매달려 있을래요 초록 잎 위 아침 햇살 다가오면 짧은 생 이대로 사라져 버릴지 몰라요 이른 새벽 여럿이 서로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요 가까이 가려 하면 그 순간 우린 굴러 떨어질 겁니다 떨어져 부서지는 아픔은 싫어요 초롱초롱한 눈 뜨고 있는 게 더 좋아요 새들 소리가 들려오는군요 이제 그런 꿈도 다 날려버린 후 멀리 달아나 호수 위 배회하며 저녁 종소리나 들을까 봅니다 내가 아름답게 산다는 것 종소리 같은 것이니까요
최정아 시인(수원) / 회오리 분청사기
회오리 하나가 분청 화병에 들어오래 머물고 있다. 몇백 년 동안 한쪽으로 감긴 회오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감겨진 바람은 반대 방향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안다 해도 깨어져 버리면 그만이다. 회전도 늙으면 그 색깔부터 바래져가고 뭉쳐진 바람이 가두고 있는 공명은 뚜껑이 없다.
공기를 묶으려면 주의가 필요하다. 뭉쳐진 바람을 왜 장식으로 올려놓았는지 손을 넣었다 빼면 엄청난 회오리풍 손금이 묻어나올 것 같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폭풍우는 없다.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후 틈이 없는 회전으로 여전히 돌고 있는 바람 그 바람 다 굳어지면 파편으로 빛날 것
날아가는 실밥이 순식간에 회오리를 깨트린 적이 있다. 분청 화병의 주둥이 안쪽에 들어있던 것은 더도 덜도 아닌 탁음의 전부였다고 여겼던 때가 있다.
파도의 포말이 만든 고동은 분청사기 색깔이다. 회오리 돌기가 있는 사기에는 내장이 들어있듯 하나의 몸으로 오래 살고 있는 화병 분명 아슬아슬한 내장이 들어있을 것이고 한쪽으로 감겨 풀지 못하는 것들은 비장함과 돌아눕지 못한 그늘이 함께 감겨있다. 가만히 귀를 대보면 묶인 바람 소리 들린다. 모든 바람 소리는 파손의 전조前兆다.
최정아 시인(수원) / 여기저기 氏
여기저기는 너무도 흔해 지명이 없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불쑥 생기는 곳 여기저기에 氏 자를 붙여주었더니 도처에 여기저기가 잘 보인다
참 따듯한 곳이고 무척 추운 곳이기도 하다 방향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들에게 氏 자를 붙여주니 꽃피고 햇볕 들어 가지들이 풍성해진다
어머니는 여기저기가 늘 붙어 다녔다 매일 여기저기를 불려 다니느라 밤잠을 설치며 온몸을 툭툭 치곤 했다 어느 날 나는 불쑥 나타나 여기저기가 되었다고 한다 손이 닿지 않는 허공은 곳곳이 없어 좋았다 닫혀 있는 곳이라 여겼다
바람의 내부나 비의 출생지가 알고 싶어 나뭇잎을 뒤집어보다 외진 골짜기 바람소리에게 말을 걸어본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곳이지만 누구에겐가 꼭 필요한 곳이 되는 여기저기 氏 간격과 간격 사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氏 자를 붙여주고 싶다
—《시인동네》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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