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기명숙 시인 / 못 박는다는 말은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1. 08:00
기명숙 시인 / 못 박는다는 말은

기명숙 시인 / 못 박는다는 말은

 

 

머리를 짓찧지 않아도 제 안을 까맣게 비워낼 수 있다면 좋겠다

 

못 박는다는 말은 벽 전체의 균열이 온몸으로 전달된다는 말

실연의 날들이 얼굴을 짓찧고 시간의 벽을 뚫고 되돌아와 내 심장을 겨눈다는 말

딱딱한 환부 구부정한 등에 쏟아지던 가로등의 질감이 당혹스러웠다는 말

박으면 박을수록 부대끼면서 살점이 으깨진다는 말

박는 자와 박히는 자가 한 몸되어 서럽게 운다는 말

낯익은 얼굴들과 밀도 높은 농담들이 날것으로 만난다는 말

생채기가 통증의 담화를 만난다는 말

금 간 콘크리트 벽 속 신음 소리가 멍울처럼 만져진다는 말

가슴에 박힌 첫사랑이 뭇별들을 앗아갔다는 말

 

잊지 마, 귓불에 대고 당신이 못을 박는다

녹슬지 않는 당신의 혀가 내 몸을 칭칭 감는다

 

 


 

 

기명숙 시인 / 노을

 

 

저녁마다 지워지는 그 아름다운 실패작을

하루치 식량처럼 꼬박꼬박 먹어도 안 없어지던 허기

여전한 내가 국경수비대에 잡혀 철책을 넘지 못하는

가도 가도 손닿지 않는 쏠쏠함의 풍요

 

-시집, <몸 밖의 안부를 묻다>, 모악, 2019

 

 


 

 

기명숙 시인 / 낙화

 

 

사랑은 애초에 짓이겨질 소식이었다고 벚꽃이 흩날리는 밤

꽃잎 가장자리 눈물에 지워진 추신을 해독하는 중이다

 

 


 

 

기명숙 시인 / 식탐

 

 

 억누르고 치대어 구웠더니 누르스름 군침 도는군. 반죽 품평을 해볼까? 숙성 안 된 자의식은 초조(初潮) 때처럼 초조해하더군. 말랑말랑을 선호하는 고객님들 죄다 킬킬거리며 침 흘리고 이스트를 넣어주세요. 저를 부풀게 해주세요. 신열 앓는 문장들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네. 먹히기 좋게 연습 또 연습 불지옥에서 뜨거워지는 게 빵의 숙명이라고 해두자. 독사가 깨문 사과로 만든 애플파이, 항생제 적셔 소젖 비린내 달달한 밀크 빵. 클리토리스를 다져 넣는다는 누드 샌드위치에 대한 소문은? 케이크에 꽂혀 있는 알 수 없 는 얼굴들은? 구름빵에는 구름이 도망간 지 오래, 계란 노른자 같은 해는 왼종일 거품을 게워내고 있네. 배 터지게 먹고 싶은 고객님들 취향을 말씀해주세요. 물론 당신의 간과 쓸개 레시피도 인기랍니다.

 

 


 

 

기명숙 시인 / 별다방

 

 

 목조 계단은 삐걱거리네 치어 떼처럼 물려왔다 간 추억의 산란지 망설이는 입술 속 감정처럼 기차는 잔기침하며 떠나갔네 턴테이블 바늘은 오후를 긁어 생체기를 내고 싶어 하였네 비지스도 락웰도 지직거리면 노을이 바다를 물들였네 간간한 해풍이 유리창을 두드렸네 무섭고도 아름다운 폭우가 지나가는 날도 있었네 꼬깃꼬깃한 편지는 내어놓지도 못하였네

 

 연착한 기차를 기다리며 그 여자는 몰라보게 늙어 있었네

 

 


 

 

기명숙 시인 / 식은 커피

 

 

 커피 한 잔을 놓고 오랫동안 앉아 있다 어둑해진 시간을 볶아 넣고 풍경의 단조로움 녹아든 커피는 씁쓸하다 폭설이 내리고 비바람이 무섭게 창을 때릴 때 혹은 라일락 향이 문틈으로 뻗어 와 가슴팍에 사무치는 날, 에로티즘에 전 나는 폭풍 같은 사랑을 하고 시를 낳는다 내 언어는 무녀리 같은 새끼를 낳고 미역국 대신 떫고 쓴 커피를 마신다 어쩌면 언어의 자궁 속 망설임의 조건과 불안의 꼬리를 자르는지도 흘깃흘깃 눈초리 울창해지는 가운데 문장들은 태어나고 죽을 운명처럼 몇 개 울음은 탯줄을 끊기 전 소거되기도 아까부터 커피는 식어 있고 로스터 안쪽 볶아지기를 기대하는 생두처럼 입적을 기다리는 몇 점의 혈血, 홀랑한 제 어미의 젖을 맹렬하게 빤다

 

- 시집 『몸 밖의 안부를 묻다』에서

 

 


 

 

기명숙 시인 / 제각祭閣

 

 

 아파트 숲 사이 덧니처럼 나있는 제각 삶과 죽음 모두에게 빗장은 열리고 침묵이 여물었으니 마당귀는 괴괴하다 깨진 기왓장 사이 신경증 환자처럼 풀이 돋고 단청이 벗겨진 처마엔 거미가 생사 경계의 암호를 부지런히 긋고 있다 서까래의 팔자주름 제상 위 검버섯은 곰팡이처럼 부풀어 있다 지붕 위를 날다 어깨뼈를 다친 바람의 비명이 고요를 찢는다 오래 앓은 견비통으로 기울어가는 제각은 혼신의 힘을 다해 등을 곧추세우고 듬성듬성 귀신들이 입장하는 축제, 움푹 팬 촛대에 향이 켜진다 향불이 맹렬히 타오르자 쿵쾅쿵쾅 심장이 들썩이고 약한 관절은 깊어지는 계절의 발목 같다 감나무 이파리도 손목을 긋고 와 말석에 앉는다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죽은 자의 령靈, 이슬도 온다. 삶보다 깊고 외롭지 않은 죽음의 방생 이 제각은 삶과 죽음 어디에나 열려있다.

 

 


 

 

기명숙 시인 / 무심사無心寺

 

 

사내가 밟는 길은 구두 뒤축처럼 움푹하다

절로 이끄는 소로는 다람쥐 송곳니에 박힌 상수리 열매만큼 반짝이고

침묵만 우려내고 있는 무심사 늑골, 너무 환해서 숨통을 조여 온다

 

사내가 보고 싶은 것은 날갯죽지가 부러진 새의 무덤

불성佛性을 탓하랴 비쩍 마른 견공이 누런 혀로 밥그릇을 핥으며

부서진 경전의 자모를 긁어모으고, 사내의 목덜미에도 경전 몇 구절이

식은땀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생은 포개지도 떼 내지도 못하는 애인처럼 거추장스럽고

탐욕을 버린 호두알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일몰 직전의 불그스레한 마음이 허공에 비명을 심어 놓고

등짝을 후려갈겨 놓은 듯 사내의 경전은 맵기만 하다

 

 


 

기명숙 시인

1967년 전남 목포 출생. 한양대학교와 우석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북어>로 등단. 2019년 전북문화관광재단 문예진흥기금을 수혜. 시집 『몸 밖의 안부를 묻다』. 현재 글쓰기센터와 공무원 연수원 등지에서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