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채 시인 / 반구대 암각화 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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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채 시인 / 반구대 암각화
나의 뿌리는 바다에서 왔다 가는 길을 묻고 또 물으며 골짜기 산모퉁이 돌아 백학이 놀던 반구대 바위로 숨어들었다
햇살이 사선으로 휘어진 바위틈에 창살을 꽂아 멧돼지와 사슴이 농사를 짓는 바닷물 따라 고래가 넘쳐흐르던 사람들은 배를 타고 흥을 돋우며 심장을 파듯 바위 글자를 새겼다
바위 글자는 물속을 헤매다가 바람의 말을 전설처럼 전하다가 숲으로 산 지 수천 년 민낯으로 세상에 나온 지 수십 년
시간은 단단해지고 자화상은 엷어졌다 물이 필요하다 혹은 물로 나의 몸이 해체된다 사람들이 물과 다툼을 벌이는 사이 온몸이 콜록거린다
다시 찾은 나의 뿌리는 뿌리는 살아 있다는
슬픈 고백을 안은 음각의 세계
-시집 <모나크 나비처럼> 2021
한영채 시인 / 달리는 황사 사진 한 장이 경고장처럼 날아든 날 그가 오고 있다 퉁퉁 부은 걸음으로 군대가 진군 하듯 황색 바람이 몰려오고 있다 캄캄한 어둠 속 앞이 보이지 않은 안개처럼 그가 이끄는 모래 태풍이 베이칭을 출발했다 도시가 숨었다 산이 숨었다 빌딩이 보이지 않는다 교회 첨탑은 희미하게 눈만 껌벅이고 눈을 감고 손을 잡아야 한다 발목 잡는 누런 알갱이들이 도시를 삼킨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얼룩진 이파리가 신음 중이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문고리를 당긴다 소리 없이 봄을 삼킬 그가 짙은 새벽안개 가면을 쓰고 달려 오고 있다
한영채 시인 / 고흐가 왔다
사월이 물감을 푼다 새벽빛이 쏟아졌는지 노랑 물안개가 핀다 바람이 몰고 온 거대한 노랑을 그림자 항아리에 꽂는다 흐르는 강물,긴 꽃밭에 어제 온 비가 깊고 푸른 물 가득하다 가을 지난 씨앗들이 아몬드나무처럼 자라 연노랑으로 일어나는 중이다
사월 중심에 선 나는, 자화상을 생각하는 사이 물망울이 별처럼 튄다 작은 바윗돌에 앉은 어린 자라가 햇볕을 쬐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랑노랑 흔들린다 2층 카페테라스를 지나는 물병아리들 어디선가 노랫소리 들린다 강물을 담은 모가지 긴 꽃병 해바라기 없어도 해바라기 가득하다
강물에 고흐가 지나간다
-시집 『모나코 나비처럼』 2021.한국문연
한영채 시인 / 미황사 -동백
끝을 봐야겠다고 미황사로 갔다 땅끝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붉디붉은 당신의 비밀을 허락한 허공은 여름 앞에서 고백을 했다
부둥켜안은 당신에게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절벽으로 뛰어내린 널브러진 말들이 숲을 이루고
천만상 돌부처 염화 미소가 벽으로 스며들어 꽃을 피우는 고백의 시간이 되고
황금소의 울음소리가 낮은 곳으로 마지막 혈서가 되어
꽃이라는 이름으로 자욱하게 지상의 뿌리로 발화되고 있다
한영채 시인 / 푸른 잎을 엿보다
귀를 열자 소리 전쟁이다 와르르 공기 알맹이 모래톱으로 쌓인다 가을로 가는 밤 오롯이 그와 대치 중 허리 구부려 혈맥을 찾는
마당 구석 남천 이파리에 숨었다가 긴 발목으로 물 위를 걷다가 세수 마친 여자의 종아릴 훔친다 빵빵해진 뱃가죽을 두드리는 하루 그의 하루는 벽돌에 기댄 구월 꽃무릇 같은
침대 오른 남자의 얼굴을 갈기다 붉게 솟구친 북쪽 벽 순간의 꽃 절창으로 피어나고 푸른 이파리 사이 엿보다 거미가 엮어둔 그물에 긴 발목이 잡히기도 하는
어둠이 좋다 새벽이 닫기 전 긴 빨대로 목을 누른 여자의 붉은 소리가 다섯 번의 자명종으로 울리고 모래알처럼 소리는 왱왱 구르고
눈동자는 붉다
한영채 시인 / 송현이
비가 내렸다, 그날 어둠 깊이 잠든 시간의 언어는 풀어지는 고요를 채울 수 없다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고개 들어 기억할 수 없는 미로迷路 빛이 들지 않은 시간 족장은 물처럼 사라지고 화석 속 젊은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엔 빛보다 깊은 그림자 그를 사랑한 나는 순장이었을까 새끼줄로 묶인 나였을까 납작한 돌이 수형번호를 달고 돌 덧널 된 가시개미가 진흙 속에 빠진 듯 켜켜이 쌓은 성城 안에 빈자리만 남았다 홍가시 이파리가 붉어질 무렵 쏘아 올린 빛의 한 켠 그가 달아준 귀고리 구석을 지키다 깨어났다 빗소리가 들리고, 겹으로 된 긴 항아리 볍씨와 콩, 밤과 복숭아씨가 궤적으로 엇돌다 굳어버린 씨앗 뚜껑달린 바리 속 그들이 여기, 사랑의 증표는 무엇, 무엇일까 구름과 햇볕과 우레의 문양들이 지나고 참꽃 나눠 먹던 나이테 출렁거리는 유리벽 물속에서 족적을 찾는
*송현: 창녕 송현동에서 발굴된 소녀 미라
한영채 시인 / 파묵칼레의 아침
붉은 성전을 지나자 소금의 전설이 솟아오르네 소금 먹은 석회수가 꽃을 이루네 신들이 찾던 이곳 목면의 성이라 부르네 수십만 평이 꽃을 피우네 발을 적시면 모두가 꽃이라네 찬란한 햇빛이 설산을 녹인 듯 옹기종기 다랭이 논처럼 눈부신 하루를 녹이네 웅덩이마다 하늘 꽃이 피어 있네 산 너머 구름이 흐르고 유리알 같은 작은 호수에 하늘이 내려앉네 아래로 콸콸 푸른 빛 신의 눈물이 흐르네 눈물 속에 내가 누워 있네 시원하게 감싸주는 어제와 오늘 시간의 꽃을 피운 파묵칼레의 아침이 오네
- 시집 <모나크 나비처럼> 2021
한영채 시인 / 신화마을*
고래가 가파르게 날숨을 뿜는다 신화로부터 멀리 와 버린 여기, 어디쯤인가 관절마다 뙤약볕이 욱신거린다 화첩처럼 펼쳐진 골목 고래들 벽면을 오른다 등대처럼 서 있는 해바라기 벽화 바람이 불어도 미동이 없다 어제 오늘의 경계가 없는 지금 혹등고래가 헤엄을 치느라고 신화마을이 파도처럼 일어난다 등뼈 굵은 황소고래가 지나가고 창문아래 나팔꽃도 자줏빛으로 피어나고 늙은 아버지 고래를 기다리다 뱃고동 소리로 돌아 올 때 마을은 또 하나의 신화가 된다 맑은 눈빛이 내려다보는 창문에 턱을 괸 누렁이가 졸고 있는 사이 벽화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리고 들숨을 뿜은 나도 벽화 속으로 들어간다 평화구판장엔 막걸리 사발 오가고 관절 식힐 비구름이 신화의 언덕을 오를 때 고래를 타고 산마을을 내려간다
*장생포 신화리 벽화마을
한영채 시인 / 백야의 시간
터널을 지나온 후 밤이 사라진다 나의 몸이 기울어진 후이다 긴긴 시간이 낮을 달린다 사라지지 않는 별을 보며 삼단 커튼을 닫는다 눈을 뜨고 잠을 청했으나 눈썹엔 서릿발이 내린다 눈이 부시다 밤이 깊었으나 전등이 필요치 않다 개미들은 영문도 모르고 집안을 맴돌았다 눈 깜빡할 사이 감청색 오로라가 휩쓸고 지난 뒤였다 뿌옇게 백야는 할 말을 잊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잃어버렸다 다시 뒤돌아 황량한 풍경을 남긴 발자국을 보며 마지막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손잡이는 필요치 않았다 방금 스쳐 간 자리에 적막은 또 스쳐 지난다 꿈을 꾸듯 어떤 기억을 찾아가는 동안 풍경의 안쪽은 망각 속에서 자랐다 이대로 북쪽으로 북쪽으로 눈을 감고 종소리를 따라 들판을 걷는 시간이다 푸른 호숫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묵직하게 펜을 들었다 백지에 다시 점을 찍기 시작한다 지지 않는 태양 너머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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