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숙 시인 / 영영이란 말의 뜻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2. 08:00
정숙 시인 / 영영이란 말의 뜻

정숙 시인 / 영영이란 말의 뜻

-가설무대2

 

 

말 한마디 하지 못하게 꽁꽁 얼려버린다

숨 거두자말자이제 끝이란 듯

빨리 길 찾아가라며 서슬 시퍼렇다

마지막 인사도 못하게 막아버린다

상주들은 그의 무대를 빨리 걷어치울

궁리만하다가 망자는 잊어버린 채

국밥 후루룩 마시며

잔치인양 웃으며 손잡고 모여든다

입관, 화장, 뼛가루 묻을 때까지도

영영 이별이무슨 뜻인지 먹먹하다

그 절차 다 끝나야 비로소 그가 없다는

사실, 날을 넘길수록 현실이 다가온다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질 때

매화 꽃소리 죽이고 피어날 때

별리가 나즉나즉 중얼거린다

누구라도, 생이 무대를 떠날 땐

봄눈이 매화 꽃잎 얼릴 때처럼 매섭게

차가워야지, 무대를 빨리 비워줘야지

 

 


 

 

정숙 시인 / 골목길

ㅡ가설무대6

 

 

이제 그림자들만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을까

신작로에는 대형버스가, 택시가 날렵하게

빠르게 달린다고 큰길만 쫓아다녔지

흙먼지와 검은 연기 달게 마시며

내가 한 마당 꿈꾸며 살아야할 무대는

이렇게 곧고, 넓어야한다며

좁은 길 흙담에 기대어 핀 달구벼슬 꽃도

봉숭아도 못 본 척 짓밟고 지나갔었지

밥 때 되면 엄마들이 제 배꼽 줄 부르느라

자야, 숙아, 철이예이

굴뚝에서 장작 타는 연기에 섞인

시든 풀냄새 비웃으며 살아온 길, 칠순이

낡은 앨범을 정리하다보니

그 시절 닿을 듯 말듯 옷깃 스치던

한 머슴애의 가련한 눈망울만 남는다

저 넓은 바다가 아닌

작은 가슴에 기대어 콩닥콩닥 뛰는

심장소리 듣고 싶어

수평선에서 희번덕거리는 까치놀 무렵

이제사 네 그림자를 찾아 나선다

 

 


 

 

정숙 시인 / 희안한 제비라 카이예-처용아내 3

 

 

서방님, 서방님예

 

외로움이 속 골빙 다 들었어예.

 

삐속 씨리게 샛바람이 다 들었어예.

 

여편네들 허전해서예,

 

고 가슴에 날렵하게 한 마리 제비 키워서예,

 

그 제비캉 노닥거린다고

 

또 칼을 빼시겠어예? 우짤랍니꺼예?

 

퍼뜩이지만예, 볼품없는 우리 여편네들

 

여왕거치 귀케 모시데예.

 

고 짜릿한 맛

 

우째 잊을 수 있을까예?

 

화투장 공산 달 밝은 밤 즐기다 보이

 

날 새는 줄 모리겠데예.

 

희안한,

 

참 희안한 제비라 카이예.

 

-시집 <신처용가> 1996 시학사

 

 


 

 

정숙 시인 / 풋울음 잡다

 

 

 딸아, 아무리 몸부림쳐도 꽃이 피지 않는다

 봄날이 오지 않는다 투덜투덜

 꽹과리 장구 깨지는 소리 따라다니지 말아라

 한 생이 자벌레 키 자가웃도 못되는데

 그렇게 헤프게 울거나 웃어 보내면 쓰겠느냐

 

 놋쇠는 그런 풋울음 잡기 위해

 불 속에서 수없이 담금질 당하고

 수 천 번 두드려 맞는단다

 주변의 쇠와 가죽 소리를 감싸 끌어안고

 재 넘어 홀로 핀 가시연의 그리움 달래주는

 징이 되기 위해서

 

 그런 재울음은 삶의 고비 몇 고비 넘기면서 한을 삭히고 달래어 흐르는 물살처럼 부드러운 징채로 두드려야, 목으로 내지르는 쇳소리 아닌 이승과 저승의 경계 허무는 울림 징하게 터져 나오느니

 

 비로소 햇살이 그 소리 비집고 들어 네 둥근 항아리 속 그늘진 도화 꽃 몽우리를 햇살로 피워 올릴 수 있는, 시의 참다운 징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

 

 


 

 

정숙 시인 / 처용아내 2

-벼랑 끝의 꽃

 

 

보이소예,

지는예 서답도 가심도 다 죽은

死火山

인 줄 아시지예? 이 가슴속엔예

안직도 용암이 펄펄 끓고 있어예.

언제 폭발할지 지도 몰라예.

울타리 밖의 꽃만 꽃인가예?

시들긴 했지만 지도 철따라 피었다 지는

꽃이라예.

시상에, 벼랑 끝의 꽃이 예뻐보인다고

지를 꺾을라 카는 눈 빠진 싸나아 있다카믄

꽃은 꽃인가봐예?

봄비는 추적추적 임 발자국 소리 겉지예.

벚꽃 꽃잎이 나풀! 나풀! 한숨지미

떨어지고 있지예. 혼차 지샐라 카이

너무 적막강산이라예.

봄밤이라예.

안 그래예?

 

 


 

 

정숙 시인 / 花蛇登仙

-전등사 3

 

 

 사랑이란 저 스쳐가는 바람결 같은 것

 

 천년 시간을 전등사의 서까래 들어 올리도록 발가벗겨 쪼그리고 앉혀진 몸

 눈바람이 몰려와 칼끝으로 빗금 그어놓거나 꽃바람이 애무 하다가 찰싹 뺨을 떄리기도 한다

 햇발은 그 분홍빛 살결 얼렸다가 녹였다가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어둠 속에 가둬버린다 법당의 염불 소리는 저승처럼 아스라이 들리고 생밤을 깨물며 돌아다니는 도깨비들과 어울리면서 제 몸에 박힌 가시들을 뽑는다

 이 갈며, 알록달록 고운 무늬로 문신을 그려 시시로 풍화되는 몸 길들인다 드디어 몇 천 번의 허물벗기로 거듭 태어난다 나부상의 나무껍질에 갇힌 속 살결 되살아나고 이젠 주모의 솜털 하나하나 눈을 뜬다

 

 추녀 밑 꽃뱀의 전생 모든 인과 벗어두고

 지글거리는 지옥의 혀 끊어버리고

 한 마리 저승새로 날아오르려

 

 


 

 

정숙 시인 / 흰 소의 울음징채를 찾아

 

 

 딸아, 네 몸도 마음도 다 징이니라

 

 한 번 울 때마다 둔탁한 쉰 소리지만 그 날갯죽지엔 잠든 귀신도 깨울 수 있는 울림의 흰 그늘이 서려 있단다

 

 살다보면 수많은 징채들이 네 가슴 두드릴 것이니 봄눈 이기려는 매화 매운 향이 낙엽까지 휩쓸어 가려는 높새바람의 춤이 한파를 못 견디는 설해목의 목 꺾는 울음소리가

 

 이 모든 바람의 징채들이 너를 칠 것이나

 그렇다고 자주 울어서는 안 되느니라

 참고 웃다가 정말로 가슴이 미어질 때

 그럴 때만 울어라, 울고 울어

 네 흐느낌 슬픔의 밑뿌리까지 적시도록

 징채의 무게 탓하지 말고

 네 떨림의 소리그늘이 은은히 퍼져나가도록

 

 눈 내리는 이 밤, 아버지

 그 말씀의 거북징채가 새삼 저를 울리고 있습니다

 

 


 

정숙 시인

경북 경산 출생. 본명: 정인숙. 경북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주 월성 중학교 전직 국어교사. 1993년 계간 《시와 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신처용가』 『위기의 꽃』 『불의 눈빛』 『영상시집』 『바람다비제』 『유배시편』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연인, 있어요』 등. 대구문학아카데미 현대시 창작반 강의. 현재 현대불교문인협회 대구경북지회장,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작가회의 이사, 시와시학동인회 부회장. 2010년 제1회 만해님시인상 작품상 수상. 2015년 대구 시인 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