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진영 시인 / 즐거운 점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2. 08:00
정진영 시인 / 즐거운 점심

정진영 시인 / 즐거운 점심

 

 

오늘은 파도를 척척 뜯어다

맛있게 싸 먹고 싶다

배춧잎 속고갱이 파도

어느 바다 한 귀퉁이를

그대로 떠내 와

내 속에 출렁이게 하고 싶다

파도 한 겹에

더위 먹은 생각 하나씩 얹어

몸도 씻어내고 마음도 씻어내고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새어나와

누구라도 함께 잇속 드러내며

소라 같은 얼굴로 마주할 수 있다면

늦은 점심쯤이야 어떠리

오늘은 남해식당 평상에 앉아

파도 꽉꽉 눌러 담은 바다가 되어

아무런 생각 없는 무인도까지

한번 가보고 싶다

​​

-시집 ≪중환자실의 까뮈≫ (시인동네, 2013)

 

 


 

 

정진영 시인 / 싸락눈

 

 

겨울 것들에게선 비린내가 난다

 

파닥이며 몸 뒤집으며

보이지도 않는 좁쌀 아가미로 숨을 쉬며

바람 물결 거슬러 오르려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손을 모아 가만히 손바닥에 가두면

사르르 지느러미 내려놓고 이내

더운 손금 속으로 꼬리 감추는

 

아직은 눈곱만 해도

자기주장하듯 확실히 앉았다 간 자리

 

물 반점 남겨놓는

 

첫눈

 

-시집 [중환자실의 까뮈], 시인동네, 2013

 

 


 

 

정진영 시인 /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그의 텔레비전을 누르면 달이 뜬다 전시장 안으로 달이 굴러 떨어진다 사각의 브라운관 속에 스티커처럼 붙어 있던 두 마리 옥토끼 달의 푸른 둘레를 짚고 일어나 화면 밖으로 튀어 나온다 노랗게 익은 달은 맛도 좋지, 말랑말랑 고무 달은 튕기기도 좋지, 아이들 달을 굴리며 저마다의 상징을 가지고 노는 동안 달 속에 서 있던 계수나무 한 나무 슬쩍 가지를 내밀어 아이들 머리 위에 달빛 수신기 하나씩 씌워준다

 

 늦은 밤 혼자 깨어 있을 때, 창을 열고 달을 향해 버튼을 눌러보라 먼 우주에 주파수를 맞추면 빛 쏟아지는 달 속으로 둥실둥실 떠오르리라

 

*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5)의 1965년 작품 제목이다

 

 


 

 

정진영 시인 / 첫사랑

 

 

한 가닥이라도 남아 있는지

수많은 가닥으로 너덜거리고 있는지

실밥 모두 삭아버렸는지

 

물속으로 무수히 던졌던 투망질

 

흐르는 물인줄 모르고

닿기도 전에 그물코를 펼쳐

간발의 물러남에도

비늘 한조각 잡아채지 못하던

 

손바닥만 한 실그물 하나로

물속 전체를 붙들고 싶었던

 

서툴게 빛나던 그때,

 

그 물여울이 궁금하다

 

 


 

 

정진영 시인 / 큐빅 지르코니아*

 

 

 액세서리 거리를 걷다가 반짝이는 머리핀 하나를 주웠네 녹슬지 않는 큐빅, 인공의 꽃, 촘촘히 박힌 지르코니아는 무한대의 생기, 저기 지나가는 저 머리 희끗한 여인도 날개 반짝이는 모조 나비를 머리에 꽂았네 인조 보석의 임무는 완벽한 착시, 늙은 여인조차 싸구려 꽃핀과 모조 나비에 빠져드는 불사의 신앙, 그러므로 지금, 누구든 반짝이는 인공의 빛을 사서 젊음을 되돌릴 수 있네 환각에 빠진 꿈의 얼굴들이 돌아다니는 액세서리 거리에서 정교히 세팅된 지르코니아에 눈빛 반짝이며, 흩날리는 내 머리칼들을 큐빅에 맡겼네.

 

*모조 다이아몬드로 액세서리에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다.

 

 


 

 

정진영 시인 / 페르소나

 

 

진저리나는 물속

너는 내 혀를 뽑아내고도

물회오리로 빙글거리지

얼굴 없는 뒷면에 나를 가두고도

아니야 아니야

천연덕스럽게 출렁거리지

입이 없어지고 있잖아

말은 어떻게 하라고

두 손으로 얼굴을 쥐어뜯네

물 묻은 단어들이 뭉개지며

내 얼굴을 지우네

숨 막히는 물속

 

한 음절씩 그대로 돌려주지

변함없이 내 말을

잠깐 일렁였을 뿐 너는,

 

너는 물속 같지

 

 


 

 

정진영 시인 / 禪으로의 초대

 

 스즈끼 순류*에게서 달이 그려진 그림 한 점 받은 순간부터 내 팔다리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얼굴을 매만져주거나 목 단추를 채워주거나 관절을 세워 일으켜주던 일들을 그간 힘들었노라고 이젠 하지 않겠노라고 자기주장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머릴 싸매고 누워 끙끙 앓다가 꿈 사나운 불면에 시달리다가 자리보전을 하다가 결국 축 늘어진 몸뚱이에게 휴가를 주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손가락 하나 곧게 일어나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내게도 사다리가!

*스즈끼 순류는 조동종 도겐道元의 법맥을 이은 선사이며 ‘선으로의 초대’는 그의 저서이다.

 

 


 

정진영 시인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충북대 철학과를 졸업. 2004년 『문학사상』에 「중환자실의 까뮈」 외 2편으로 등단.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을 수혜. 시집 『중환자실의 까뮈』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