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담 시인 / 땀의 무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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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담 시인 / 땀의 무게 땀을 모아 호수에 풀어놓으면 아이의 보조에 같다 어깨에 맨 짐은 한쪽엔 자식 한쪽엔 삶 하늘의 닿은 계단을 짐을 지고 오른다 천 근의 무게라 할지라도 남들이 하찮은 이 일이라 할 때 자식 키운 기쁨으로 걷는다 오악의 산 화산과 맞서 오르는 사내 산이 두 손 들고 그 앞에 바짝 엎드려 길을 내주고 푸념미나 불평없이 아이의 미소를 메고 가는 화산 짐꾼 벼랑 끝이 그가 가는 길을 열어주는
-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
이지담 시인 / 관계
표정을 숨기려는 공은 사냥개가 된다 투수의 손에서 벗어난 순간 직구로 날아갈 것인가 변화구로 날아갈 것인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강속구도 좋으리 공기를 가르며 왼쪽과 오른쪽 빈구석을 찾아 이빨을 드러낸다
하루가 한 생애인 듯 공과 생을 같이 한 투수 구름처럼 띄웠다가 쏜살같이 달려가 먹이를 물어오는 사냥개가 되었지만 안심할 수 없는 일
공을 던지는 자와 방망이를 휘두르는 자 사이에서 물음표가 되었다가 순간 나타나는 배반을 일삼는 공
승리에 종지부를 찍을 기세로 몰아붙이며 변화구를 던진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순간의 정직함으로 방망이에게 두들겨 맞는다 담장을 훌쩍 넘어가고 싶은 공을 읽지 못한 뒤집힌 게임, 함성은 방망이 편으로 자리를 바꾼다
공은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부르고
벤치로 돌아간 앳된 투수의 양 볼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포물선으로 감정의 창이 열리고 공을 따라 담장 너머로 끌려 올라갔다 끌려 내려오기를 반복
다시 돌아서서 마주 보면
공에게 놀아나지 않으려는 투수와 투수를 길들이려는 공은 서로의 감정을 묻어둔다
—2022년 시 전문 계간 《딩아돌하》 가을호
이지담 시인 / 활의 언어
굽은 등이 자랑이었던 활
허리를 펴며 시위를 잡아당긴 말들 화살촉 끝에 묻힌 독처럼 퍼져나간다
나무의 언어는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바다의 언어는 파도의 일렁임으로 새의 언어는 날갯짓으로 하늘은 변화무쌍한 구름으로
귀에서 심장까지 가는 동안
손가락이 가리키는 저 끝에서 냄비처럼 끓다가 옮겨 다니는 과녁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화살을 놓기 전 다른 손가락들은 나를 가리키고 있음을 본다
스스로 과녁이 되어야 한다 손가락 끝에 맺힌 핏자국을 보며 시위를 떠나 돌아올 줄 모르는 말들에게
이지담 시인 / 금메달
물을 잡아당기고 미는 선수였다 몸과 물살이 하나 되어
그가 가는 길 어디든 물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따라왔다
아테네 올림픽 물살을 헤쳐 딴 금메달을 팔았다
정면으로 자신을 바라본 그 마음속에 새겨진 금메달 하나면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필요없는 거리
먼 곳에서 몸이 굳어가는 아이에게 물살에 떠밀려오는 아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물결에 찍혀졌던 발자국은 흐른다 물 위를 둥둥 떠가는 붉은배롱꽃처럼
이지담 시인 / 자물통 속의 눈
눈들이 자물통 구멍 속에 숨었다
보는 것이 두려운 눈 눈을 떠도 눈물이 보이지 않는 눈 영혼 없이 바다 거품으로 둥둥 떠도는 눈들이다
자물통 구멍을 들여다본 나비는 한가로이 감자 꽃을 좋아했다 시끄럽게 떠들던 매미는 열쇠열쇠 불렀을까 오래도록 지켜보던 나무가 있었다 열쇠는 신비로운 별이 되려는 것일까
눈은 눈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시계는 돌아가고 구멍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갇혔다는 이 두려움이 견딜 수 없어
스스로 하얀 종이와 가깝다고 생각했던 선택받지 못한 문장들 가지 끝에서 뿌리에까지 오르내리며 눈이 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기어이 겨울을 이겨낸 꽃눈 새순 밀어올려 자신으로부터 찢고 나오는 눈들 자물통을 펑펑 터뜨린다 비겁하여 숨은 눈들을 호명한다
이지담 시인 / 복숭아밭
나무의 깃털들이 내게로 날아왔다 기쁠 희자 모양으로 나풀나풀 잠깐이었다
책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빗방울 떨어진 자리에 땅이 패였다 책을 덮고 나면 흔들린 자국이 가슴에 남았다
뱀이 꽃잎을 물고 꼬리춤을 추며 사라졌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옹기종기 노여 있는 버섯들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라졌던 문장들이 단추를 풀고 고개 내밀고 있었다 혼자일 때만이 보이는 것들 이제 바람이 부는 것쯤이야
비를 맞고 싶어서 먹구름을 기다렸다 행 밖에 메모해 둔 자라투스트라는 떠나고 없었다 복숭아밭을 나오면서 문에 자물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들어가지 못할까 두려웠다
이지담 시인 / 벽 일기
‘노’로 시작하는 낱말 써오기 숙제를 받아든 아이 노랑색, 노동자, 노조, 노숙이란 단어를 써 냈다. 노루, 노래, 노을, 노력, 노고지리 같은 말을 떠올리지 못한 것* 해고노동자와 거리 농성을 하고 있는 아빠 생각에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싫단다 동그라미 방학 계획표에는 반쯤 떠오른 햇살, 어느 뉴스에서도 숨 쉴 곳 없는 노동자들 양파처럼 속에 눈물 머금고 있을 뿐 갈라진 아빠의 손 틈에서 눈들이 바라보고 있다 기름때에 미끄러져도 다시 일어나기로 걸었던 손가락 스케치북 속에 스크래치 된 숨은 말들 희미한 빛이 가장 어두운 곳을 뚫고 나오기를 동화책을 읽어주던 시간들 접고 또 접어 가슴 속 떠돌아다니던 나비를 접어 아이는 아빠에게로 날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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