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라 시인 / 길을 튜닝하다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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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라 시인 / 길을 튜닝하다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으며 간다 지팡이를 짚을 때마다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튜닝된다 다리가 휘고 걸음이 휘고 허리가 휘었다 젊어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그 시절이 허리를 굽히고 지팡이로 짚으며 머리를 흔든다 자동차 위에 올려있는 빛 받은 인형강아지 한 마리 고개를 끄덕인다 안암로로 가는 전철에 앉은 할머니 여전히 꼬부랑 허리를 기대고 졸음을 기댄다 옆에 있는 할아버지 좋아라 어깨를 내준다 한쪽으로 머리를 기대는 아가씨 옆에 있던 총각이 싫어라 어깨 안고 사라진다 연두같은 두 남녀,밤새 뭐했을까 야한 상상을 한 나의 눈을 뜨게하는 그 남자 뒤돌아서서 꿈꾸는 그녀를 보며 뭐 저런 게 있어 식으로 주파수를 내던지며 사라진다 직선으로만 가는 줄 알았던 나의 눈길이 꼬부라져 돌아갔다
전하라 시인 / 검정 볼펜
나는 외다리다 그래서 늘 몸을 비스듬히 하고 다리를 절고 다닌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꼭 잡아 바로 세우며 자신들의 마음까지 다잡는다 가끔 내가 길을 잃으면 모르는 사람들은 내게 집을 찾아주지 않고 자기랑 살기를 원한다 건망증이 심한 나는 곧바로 그 사람을 따라가 그와 동거를 한다 사람들은 나를 왜소하다 매일 같은 옷만 입는다 핀잔을 주지만 나는 유행을 타는 옷보다는 한 가지 옷의 정장차림이라도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 좋다 가끔 나는 남의 보증을 서거나 이혼을 요구하기도 해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속은 검지만 밝은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 나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한 갈망으로 배를 출항시겼듯
늘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시집 《구름모자 가게》 중에서
전하라 시인 / 1인치의 꿈, 줄임표
약수역에서 잠시 쉬며 6호선을 기다린다
4-3으로 넘어서려는 뱃살경제는 3-3의 경계에서 1인치의 감가상각을 꿈꾼다 목련꽃잎을 겹쳐입은 봄의 칼라가 다르듯이 갑질하는 뱃살경제는 혼선에 빠진다 주저리 주저리 먹어대는 주전부리 뻥 뜷린 짱구과자에 지방이 솔솔 빠져나가는 꿈을 꾼다 좀처럼 줄지 않은 나와의 1인치 3-3에서 콜라병 몸매가 문을 연다 실 경제 기대치 2-6 발목에 묶인 붉은 하이힐
여름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전하라 시인 / 나무와 새
벌판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한 그루 서 있었죠 나무는 늘 가슴이 휑 했죠 구멍 숭숭 뚫린 나무는 누군가 그리웠죠 아무리 큰 그늘을 가진 그라도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죠 어느 날 새떼들이 날아왔죠 나무의 가슴은 노래로 채워졌죠
늘 날개를 저어야만 하는 새들은 어디선가 쉬고 싶었죠 한 참 날다보니 플라타너스가 보였죠 새들은 나무 품으로 숨어들었죠 나무는 새 대신 날개를 푸덕여주었죠 새들은 앉아서도 여전히 날 수 있죠
나무는 새의 즐거운 노래교실 새는 나무의 푸르른 시냇물이죠
-시집 <발가락 옹이> 중에서
전하라 시인 / 찬밥 새옹지마를 꿈꾸며
비닐팩에 담아 넣어둔 냉장고에서 밥을 꺼낸다 오랜만에 꺼낸 밥이 푸석하다
부도 위기에 직면한 당사자로서 세상의 눈초리에서 비껴 앉은 그와 닮았다 위선자들의 말꼬리에 끌리어 법정에 서고 때론 버림받고 굴욕으로 수모를 겪지만 따듯한 봄날을 꿈꾸는 당신 해결해줄 수도 조언해줄 수도 없는 당신 오로지 홀로 떨어야만 하는 당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이 마냥 기다리는 것만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심정은 김이 모락거리는 찬밥이라도 끓여주고 싶다 지하철로 버스로 해결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뛰어다니지만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당신
조용히 안으로 안으로 찬밥덩이가 되어가고 있는 당신을 보고있다 더 이상 한파가 없는 곳에서 행복한 웃음을 피우고 싶다
전하라 시인 / 식물성 보고서
소낙비 내린 후 빗방울을 머금은 나뭇잎에 손을 내밀어요 봄비에 쭉 늘어나는 식물성을 감각해요 싱싱한 봄앓이를 실컷 토해내는 연둣빛 병든 내가 다가가도 귀찮아하지 않아요
두 팔을 벌리고 나뭇가지 흉내를 내요 햇살이 집요하게 내 몸 안쪽에 자리한 암세포를 간지럽혀요 검정은 놀라지 않아요 괜찮아요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진통제를 가방에 넣고 산책을 나가요 비가 쓸어낸 풍경은 먼지 하나없이 정갈해요 마음의 가시거리까지 길어졌어요 느티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들이 나를 마중 나올 것만 같아요 휴~ 하고 하늘이 건넨 웃음이 마치 나를 위로 하는 것 같아요
밤새 통증으로 치닫던 그 모든 순간들이 사르르 사라져 버리네요 사악함이 하나도 없는 풍경들 내가 죽으면 나를 기꺼이 받아줄까요 숲은 허락한 적 없는데 자꾸만 내가 숲을 끌어당기고 있어요 -계간 『상상인』 2024년 가을호 발표
전하라 시인 / 파밭의 나비
억수같이 장마비가 내리던 날 멀리서 한 시인이 찿아왔다. 우린 날굿이한다며 풍물시장으로 갔다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시켰다 막걸리 병은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오징어는 파전 속에서 꽃이 되었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근심들 막걸리 한 잔에 추억의 나비가 파밭에서 나풀거렸다
시인의 가방에서 꺼낸 부채 한 점 얼쑤, 적벽가 한 마당에 오징어가 먹물 튀기며 한계령을 넘어가고 있다
전하라 시인 / 귀는 귀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문밖에서 들리는 미세한 소음에 스피커를 줄인다 외마디의 비명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다 4층에서 들려오는 쇠망치를 두들기는 소리 톱으로 어둠을 자르는 소리에 하얀 귀를 밀착시킨다 한 겹 벗겨낸 틈으로 오리들이 뒤뚱거리며 걷는다 어제 지나쳐간 여우들도 꼬리를 흔들며 지나간다 휘호를 긋는 왜가리도 물결을 흐트러뜨리며 올라간다 소리는 마치 혼선의 마차에 오른 마부 같다 번개처럼 짜내는 베틀에 날실과 씨실이 교차되고 있다 소리와 소음의 혼합체에 놀라움이 움츠러드는 연쇄파동이 인다 궁금한 맘에 쫑긋 세운 모퉁이에 당나귀 한 마리 걸어나간다 사뭇,지칠 것 같은 길에서 떨어지는 소음문자가 길을 만든다 밀착된 귀를 떨어뜨린다 자연으로 향한 회귀 귀의 본능에 잠에서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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