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영 시인 / 분홍신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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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 시인 / 분홍신
내 신경의 줄을 가늘게 하여 그 위에 춤을 추게 하라 끊어질 듯 성난 신경 위에서 분홍신을 신고 날뛰게 하라 귓 속에서 둥둥거리는 북소리에 맞춰 발톱 끝에 푸른 달이 떠오를 때까지 높이 뛰어오르게 하라 깊게 떨어지게 하라 불면의 밤을 밀치고 펄럭이는 대기를 찢으며 두둥실 떠오르게 하라 혹은 처절하게 떨어지게 하라 내 신경의 팽팽한 줄 위에서 영원히 멈출 수 없는 춤을 추게 하라
-시집 <물고기의 방>에서
윤지영 시인 / 영영
어디서 한 사람쯤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비에 젖은 골목이 일어섰다 뭉개지는 사이 딸기맛 풍선을 불다 숨이 턱,멎는 사이 둘은 너무 고독하고 셋은 너무 무거운 사이 무언가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겠다,겨우 알전구의 반들반들한 표면 위에 금이 가고 그 사이
괜찮다는 말을 듣자고 미안하다고 한 건 아닌데 비뚜름히 걸린 풍경을 지워버리고 찻잔 속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사이 미안하다고도 안 했는데
문이 열렸다 닫히는 사이 괜찮다,괜찮다,다 괜찮다는 말이 떠올라 우리 사이,겨우 은하계처럼 빠르게 팽창하는 사이 부유하다 증발해버리는 사이
거기는 너였을 수도 있지만 나였을 수도 있고 그때 누구라도 알 수 없고 알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점점 벌어지는 사이로 해가 뜨고 별이 지는 일처럼 흔한 일 겨우
어디선가는 바퀴가 구르고 어디선가는 강이 침몰하는데 아무도 알 수 없는 사이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이 겨우,그런 사이가 영영
윤지영 시인 / 호주머니의 용도
호주머니가 좋아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
호주머니 속은 따뜻하고 조용해
화 난 사람 앞에서는 네 개의 손가락으로 하나의 엄지를 가지런히 감싸 쥐고 슬픈 사람이 말을 걸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기도를 하지 호주머니 속에서
(화난 사람은 슬픈 사람)
호주머니 하나에 두 손을 넣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기분, 지평선까지 어둠 속에 포갠 두 개의 가슴처럼 두 손을 깍지끼고 달궈지며, 간지럽히며 지치지도 않고
혼자 있을 땐 손을 꺼내, 호주머니에서 활짝 펴서 흔들어 먼 곳을 향해, 물고기처럼 손금에 고인 물기를 말릴 때 바람이 불면 더 좋겠지
주먹이 되었다 물고기가 되었다 돌멩이가 되어 모래의 꿈을 꾸는 곳, 언제든 바스라질 준비를 하며 따뜻하고 조용하게 닳아가며, 모래처럼 호주머니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윤지영 시인 / 조용한 바람
지친 그대의 어깨를 말없이 감싸 안을 수 있기를
닫힌 그대의 마음을 말없이 다독여줄 수 있기를
외로운 그대의 곁을 말없이 지켜줄 수 있기를
소리없는 바람처럼 그렇게 머무를 수 있기를
윤지영 시인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식구들이 잠들어 오히려 부산한 여름밤 방충망 사이 모기가 부산스럽다 모기 날개 위에 달빛이 부산스럽다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 우유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버터는 냉장고 속에서도 녹아 있었다 우유는 냉장고 속에서도 상해 있었다 노트북도 배가 고픈지 하얗게 화면이 지워진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가 사라지고, 깜빡이는 그리움이 사라진다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윤지영 시인 / 파국
1. 너, 마침내 이야기가 시작되려 할 적에 먼 곳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흐느낌 가늘게 열린 균열을 따라 여긴 아니야 너는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2. 이야기는 다시 처음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옛날 옛적에 고독의 아이가 숲속으로 가다 말고 자꾸 돌아보는 거기 천체의 깃발이 펄럭임을 멈추고 얇고 허약한 사람들이 아가미로 숨 쉬는 도시 아니야, 아니야, 거대한 부정으로 갓 죽은 아가들이 벌을 서는 나라 거대한 동공에 켜켜이 엎드려
3. 그러고도, 영원히 꽃이 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자칫, 탐욕의 아이, 붉은 죄의 연대로 생겨난 너무나 그럴 듯한 이야기는 또 다시 잔혹한 절정과 막을 수 없는 파국을 숨긴 채
4. 거대한 나무 아래 구멍을 파고 두 발을 벗어 땅에 묻고 두 팔을 뻗어 눈을 가리고 아니야, 아니야, 나는 아니야 흠칫 놀라 짐짓 아파 서로의 눈으로 흘리는 이야기 서로의 귀에서 막막한 이야기 두 시간 째 미동도 없이
윤지영 시인 / 일상의 미래
유모차에 기대 새를 부르는 노파야 그네에 매달려 발을 구르는 노인아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메일함에는 열어보지 않은 부고가 쌓이고 국경은 점점 높아지는데 우리라는 말에서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 지워지고 있는데
(우리는) 각자의 골방에 앉아 일기를 쓰거나 머리를 쓰다듬겠지, 스스로
가끔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화분에서는 토마토가 익어갈 거야 새는 창밖에서만 날고 (우리는) 방 안에서도 산책을 거르지 말자,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건강해야지 오늘의 알약을 챙겨 먹으며
촛불 주위에 동그랗게 둘러앉던 시간아 말보다 먼저 부풀어 오르던 포옹아
입을 가린 채 사랑을 말해도 손을 숨긴 채 안부를 전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일까 다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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