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도 시인 / 가난한 세월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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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도 시인 / 가난한 세월
뻐꾹 뻐꾹 뻐꾹 정부지원금을 아껴 장례비용을 모으던 회관 할머니가 죽은 지도 삼 년이 흘렀다 뻐꾹 뻐꾹 뻐꾹 마을의 유일한 처녀였던 향미는 아이가 딸린 홀아비의 유혹에 넘어가 떠나고 뻐꾹 뻐꾹 뻐꾹 젊어서 허리를 다쳤으나 돈이 없어 육십이 넘도록 기역자로 허리를 굽힌 채 살아왔던 꼬부랑 할머니도 할아버지만 남긴 채 땅 속 집으로 갔다 뻐꾹 뻐꾹 뻐꾹 몇 년 만에 찾아온 형님의 머리는 그새 반백이 되었고 뻐꾹 뻐꾹 뻐꾹 둥개둥개 안아 재우던 아이의 키가 내 목에 닿는다
내가 내 아들만할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때 울던 뻐꾸기 소리가 뻐꾹 뻐꾹 뻐꾹 지금도 들려온다
유승도 시인 / 뱃속의 이
이거 봐, 사람 이가 분명하잖아 내장을 덜 뺐던 모양이야 먹다 보니까 씹히잖아
아내가 손바닥에 놓인 이를 내 눈앞으로 들이민다 어둠이 스며든 이는 내가 보기에도 사람의 이다 사람을 먹었나 먹을 수도 있겠지 그 넓은 바다에 사람 시체가 한두 구만 가라앉겠어, 맛있는 먹이를 갈치가 놔둘 리도 없을 테고
어째 갈치 맛이 그만이더라니 이거 벌써 다 먹었나 좀 더 없어 근데 이는 괜찮아 이가 이를 씹었으니
아내는 말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들어온다 뒤꼍 두충나무 아래 묻었어요
쩝쩝, 거뭇거뭇한 갈치조림 국물에 밥을 비벼 먹으며 태평양 어디 햇살 몇 오라기 겨우 비집고 들어가는 바닷속에서 우라타당 어둠을 흔들며 송장을 물어뜯는 갈치를 바라본다 육식동물의 이빨로 사람의 입까지 찢어내어 삼키는 갈치의 즐거운 노동, 갈치의 몸에서 튕겨 나온 은빛이 잘게 부서져 퍼져나간다 죽음을 파먹으며 허연 살을 찌우는 갈치의 팔팔한 흔들림이 심해의 구덩이에서 떠오른다
숟가락을 놓은 뒤 배를 가린 옷을 슬쩍 들춰본다 살결이 바닷물처럼 출렁이고 있다 산산이 조각난 갈치의 몸이 녹아내리며 일렁이는 뱃속이 보인다
-시집 『천만년이 내린다』에서
유승도 시인 / 기다림의 끝
투투투톡 뿌드드드드드 마음을 일으킨다 몸으로 만들어, 터지는 마음을 몸으로 만들어 일으킨다 펼친다 하룻밤 또는 이틀 밤 사이 무더움과 가뭄의 기억이야 말끔히 씻어버리고 막 돌 지난 아이, 살이 통통 오른 몸을 만든다 참나무 겉껍질을 들추며 내가 먼저야 아니 내가 먼저 펼칠 거야 우드드드드드 투투투투툭 표고버섯들의 반란이다 서로 겹치며 밀치며 눌리며 뻗쳐나오는 표고버섯들 때가 되었어 때가 되었어 그래 때가 되었어 급하기도 해라 참나무에 들어 피어날 날을 기다리던 세월을 잊었어라 나 한번 멋지게 피어볼래 둥글게 통통하게, 저 태양을 가려볼래 온 땅을 덮어볼래 막을 수 없을 거야 막아도 나갈 거야 가볼래 눌려서 피지 못해도 나가볼래 나가볼래 나가볼래 우트트트특 트트트특 달팽이의 먹이가 되면서도 꿋꿋하게 쑥쑥 활짝 활짝 자신의 마음을 열어젖힌다 공중으로 퉁 튕겨오를 기세다 앞을 가리던 참나무 껍질을 밀어 올리며 버섯들이 머리를 내민다 으아아아아아
-시집 『일방적 사랑』에서
유승도 시인 / 산을 보면서
산이 구불구불 맥을 이뤄 위로 아래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꿈틀꿈틀 거대한 벌레가 기어가는 모습이다 가만히 있으면서도 쉼 없이 나아가는 산이 부럽기도 하다 사람들이 봉우리마다 이름을 지어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도 산이 부러워서일 거다 사람은 산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스승으로 받들기도 한다 어떤 이는 스스로 산이 되기도 한다 산은 가만히 있기에 되지 못할 게 없다
유승도 시인 / 서울도 자연이다
자연 속에 파묻혀 사니 좋겠네 서울도 자연인데 뭐 그런가? 사람이 자연인데, 그들이 만든 도시가 자연이 아닐 리가 없잖아
친구는 전화를 급히 끊었다 바쁜 모양이다 호랑지빠귀는 동산에 해가 올라 숲을 환하게 만들었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저 새도 바쁘구나
유승도 시인 / 허공
내 팔뚝만한 새 한 마리 느릅나무 가지에 앉아 머리보다 높게 꽁지를 하늘로 올리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쓱쓱 천천히 부채모양을 그리며 하늘의 유리창을 닦더니 돌연 날아가면 어떡하냐
유승도 시인 / 화려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걸치고 다닐 만은 한 옷
시를 쓰던 사람들이 대학원엘 들어가고 문예창작과가 늘어가고 시인 위에 교수란 직함이 들어간 이력을 가진 문우들이 늘어가면서 아하, 시인이란 건 무엇이 되기 위한 자격증이거나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한 승차권 정도 된다는 걸 알았다 무엇인가가 되었거나 어딘가에 당도한 사람들에겐 화려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걸치고 다닐 만한 외투가 되어 주었다
색이 바래긴 했어도 입으려는 사람은 늘어가는 가운데 시인이란 옷을 걸친 인간들이 패를 지어 몰려다니는 풍경을 심심찮게 보곤 한다
기후변화에 내몰려 설원 빙판을 야윈 몸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북극곰 한 마리가 그리운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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