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아 시인 / 비 갠 후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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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아 시인 / 비 갠 후
나무는 뿌리로 받아 적는다 흙은 오래된 공책 땅벌레 자음모음으로 기어다니고 나무는 밑줄 그어 길을 만든다 우리가 밟고 지나는 수많은 문장 아래 더 많은 길이 있다 보도 위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조차, 모든 것이 길이다 하늘이 요약된 흙은, 오랜 시간 읽혀왔으리 나무가 미처 쓰지 못한 말들 낙엽으로 뒹굴고 바람이 책장을 넘기면 햇살이 제일 먼저 다가와 읽는다 비 갠 후, 길은 제 몸 위에 필독해야 할 거대한 책 한 권, 여러 갈래로 터 놓는다
안시아 시인 / 엽서
네가 보내온 엽서엔 악보만 그려져 있었어 나는 답장을 쓰기로 했지 기억에 없는 저녁을 발음하며 세 번 흉내 내고 싶은 말투로 악보만 그려진 너의 엽서는 음표처럼 홀가분해지고 음악이 멈추지 않았어 사소한 비밀도 강박관념도 잊혀지듯 지나갔어 건반을 누르듯 바람의 맥을 짚고 너의 의도를 파악해갔지 발음이 되기 전의 음표 나는 힘껏 배에 힘을 주고 목청을 돋우며 글쎄 말이야, 너의 후렴구를
안시아 시인 / 소래포구 가는 길
버스 좌석마다 먼저 자리잡은 햇살, 노파가 살며시 무릎 위에 앉혀 놓는다 운전석에 걸린 시계는 오래 전부터 시간을 위반하고 있다 원심(圓心)처럼 끌어당기는 바다, 이정표방향으로 버스가 끼익 허리를 꺾자 꾸러미를 잡은 노파의 손이 불끈 쥐어 진다 중 심에서 멀어질수록 生은 동요하는 법 정류장마다 차창 속 풍경을 담은 오목한 접시꽃이 한창이다 바람이 슬쩍 기울이자 쨍그랑, 이내 햇살이 쏟아지고 금이 가 있다 버스가 퉁겨지듯 들썩들썩 비포장 도로를 지날 때 가늘게 떨리던 시계바늘조차 가끔 제 자리로 돌아오는 소래포구 가는 길, 파도가 서둘러 무임승차하고 있다
안시아 시인 / 오후
책상 끝 동전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제법 멀찍한 곳까지 온 몸으로 또르르 길을 낸다 마지막 힘을 다해 원을 그리다가 또 하나의 원으로 끝내 눕는다 연산기호같이 셈해지던 나날들, 창틈으로 햇살이 아득히 녹슬어 있는 기억을 비출 때 동전은 어떤 해답으로 이곳까지 거슬러 왔을까 손끝으로 동전을 줍다가 그만 놓치고 만다 바닥의 중심을 퉁겨내며 굴러가는 동전, 때론 가장 절박한 순간이 生의 궤적을 그린다 가만히 주워 올린 손끝에서 또다시 낭떠러지가 되는 오후, 한껏 차 오른 봄날이 위태롭다 컴퓨터 모니터는 이따금씩 보호색을 띄며 갖가지 모양의 도형을 빙글빙글 돌린다 책상 귀퉁이 싸인펜이 휴지뭉텅이에 검은 노을을 풀어낸지 얼마나 되었을까 창 밖, 자전거 바퀴가 길을 일으켜 세우며 언덕을 오르고 있다
안시아 시인 / 그녀의 숲
여자는 펼쳐둔 나물 옆에서 담배를 물고 있다. 숱이 빠진 머리 칼은 시들어 부석거렸고 툭 불거져 나온 발꿈치는 길을 반쯤 꺾어 신은 채 갈라져 있다. 후 - 연기를 피워 올릴 때마다 무언가를 걸러내듯 숨을 몰아쉬던 여자, 몸 속에 뿌리내린 구근들은 이미 우거질대로 우거져 있다. 깊어지고 있다. 자꾸만 무언가를 키워내고 있다 여자는,
여러 텃밭을 옮겨다니다 결국 제 몸속에 둥근 세상을 내린다. 쏟아버릴 것이 많아 그 숲속, 벼랑을 잊지 않고 세운 여자, 들썩일 때마다 뿌리가 드러난다. 까맣게 시들어 가는 저녁, 누군가 떨이해 간 그녀의 숲이 비닐봉지에서 뿌리의 기억을 더듬는다. 시한부로 머뭇거리는 연기들, 바닥위로 떨어지는 담배꽁초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안시아 시인 / 파도여인숙
나는 버림받을 여자가 아니에요 창문마다 네모랗게 저당 잡힌 밤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극적이에요 담배 좀 이리 줘요 우리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아요? 여기는 바다가 너무 가까워요 이 바다가 정원이라면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부자로군요 이 정도면 나, 쓸만하지 않나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스워 다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 끄덕이지 말아요 밤 밖으로 수평선이 넘치고 아 이런, 술잔도 넘쳤나요 지금 걱정하고 있군요 취하지 않았을 때가 가장 위험할지 몰라요 *오래될수록 좋은 건 술 밖에 없어요 갈곳도 없고 돈도 없다고 내가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요? 당신 마음은 어떤가요 죽고 싶어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았던 게 아니에요 부서지기 위해 바다 끝으로 밀려온 파도처럼 이곳까지 떠나온 게 아니던가요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여긴 정말 파도말고는 아무도 없군요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그 큰 눈을 그리 꿈벅대는 거예요 파도처럼 이리 와 봐요 나는 섬이에요
*영화 '마리아와 여인숙'에 나오는 대사
안시아 시인 / 길 위의 사람
그는 절뚝거리는 걸음을 옮기며 광고전단을 떼어내고 있다 골목마다 햇살이 창가로 향하고 누군가 그 끝을 잡으며 기지개를 켠다 채 녹지 않은 눈 속 발자국은 아직 발이 시리다 빅토리아나이트를 소문내느라 밤새 퍽이나 후끈했을 벽 한켠, 잘 떨어지지 않는지 한참을 긁어내고 있다 종이 한 장도 버티기 위해 벽에 오래 배기는 부분이 있듯 발을 디딜 때마다 그의 한쪽 다리가 바닥을 지그시 밟는다. 햇살이 햇살을 끌어당길 무렵 계단에 걸터앉은 그가 담배를 꺼낸다 태어나 한 걸음도 떼어보지 못한 눈사람 하나가 묵묵히 그 앞에 서 있다 보일러 연통이 날숨을 피워올릴 때마다 숭숭 뚫린 중심을 온기로 채우는 눈사람, 계단 아래로 천천히 녹아내린다 비로소 온몸으로 길을 걸어간다 그의 발이 서서히 땅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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