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서정춘 시인 / 종소리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3. 08:00
서정춘 시인 / 종소리

서정춘 시인 / 종소리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morning glory

 

 


 

 

서정춘 시인 / 고들빼기

 

 

먹어 보면 안다

어째서 궁중 진상품이었는지 먹어 보면 안다

놋숟가락으로 떠 올린 뜨신 햅쌀밥에

옻칠 젓가락이나 대나무 젓가락으로

 

고들빼기김치를 얹어서 먹어 보면 안다

이 맛을 쓰다고 해야 하나

떫다고 해야 하나

먹어 보면 안다

젓국에 젖어 우러난 쓴맛이냐

 

쓴맛을 다스리는 다진 마늘, 생강 맛이냐

이 맛 저 맛 다스리는 매콤달콤 신맛이냐

형용사가 풍부한 한국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나로그 맛이냐

먹어 보면 안다

 

한 번도 두 번도 여러 번도

입 안으로 온몸이 들어와 자지러지는

이 맛의 극치!!

아니다,

끝으로 맛볼 것은

이빨 사이에 끼었다가 씹히는

금싸라기 같은 참깨 맛!!

 

 


 

 

서정춘 시인 / 낙선자들에게

(현대시학 신인상 심사를 마치고)

 

 

 무려, 1,410편의 응모작 중에서 이정화, 유금옥의 시들이 당선작으로 뽑혔다.많은 작품들이 아쉬움을 남기고 아슬아슬 떨어져 나갔다. 이들 모두가 시정신으로서의 장인정신에 많이 게을렀던 것으로 보인다. 바늘 끝으로 찍어 벼룩을 잡아버리겠다는 우직하면서 치열한 시정신, 그것이 장인정신이다. 긴장과 절제를 잃으면 시는 멀리 튀어버리는 벼룩의 생리를 닮아 있다. 어서, 낙선자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글이 있다. 고려 때, 백운거사 이규보는 동국 이상국집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어려운 글자를 쓰기 좋아해서 남을 쉽게 현혹하려 했다면 이것은 함정을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격이다. 사연은 순탄하지 못하면서 끌어다 쓰기를 일삼는다면 이것은 강제로 남을 내게 따르게 하려는 체격이다.속된 말을 많이 쓴다면 이것은 시골 첨지가 모여 이야기하는 체격이다.기피해야 할 말을 함부로 쓰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존귀를 침범하는 체격이다.사설이 어수선한대로 두고 다듬지 않았다면 이것은 잡초가 밭에 우거진 체격이니, 이런 마땅치 못한 체격을 다 벗어난 뒤에야 정말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남이 내 시의 병을 말해 주는 이가 있으면 기쁜 일이다. 그 말이 옳으면 따를 것이고 옳지 않아도 내 생각대로 하면 그만인데, 하필 듣기 싫어해서 마치 임금이 간함을 거부하여 제 잘못을 모르듯이 하리요. 무릇 시를 지었다면 반복해서 읽어보되, 내가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 또는 평생에 제일 미워하던 사람의 작품처럼 여겨 덜되고 잘못된 것을 찾아 보아서 찾을 수 없을 때 내놓아 발표할 것이다.>

 

 낙선자들이여, 시 백 편을 쓰고 아흔아홉 편을 버릴 줄도 아시라. 나머지 한 편 한 편으로 주춧돌을 놓겠다는 각성이 있어야 하겠다. 더욱 분발할 일이다. 나도 함께

 

 


 

 

서정춘 시인 / 늦꽃

 

 

들국화는 오래 참고

늦꽃으로 핀다

그러나

말없이 이름 없는

가인佳人 같아 좋다

아주 조그맣고

예쁘다

예쁘다를 위하여

늦가을 햇볕이

아직 따뜻했음 좋겠는데

 

이 꽃이

바람의 무게를 달고

흘린 듯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꽃이

가장 오래된 늦꽃이고

꽃이지만 중생 같다

 

-시집 『죽편 竹篇』 황금알, 2016.

 

 


 

 

서정춘 시인 /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글고 있고

 

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기칼로 떽기칼로 나물 캐고 있고

 

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뚱이나 핥아 먹이고

 

나는 나는 나는

 

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서정춘 시인 /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서정춘 시인 / 봄, 파르티잔

 

 

꽃 그려 새 울려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서정춘 시인 / 기러기

 

 

허드레

허드레

높이 들어올리는

가을 하늘

늦비

올까

말까

가을걷이

들판을

도르레

도르레 소리로

날아오른 기러기떼

흐드레

흐드레

빨랫줄에

빨래를 걷어가는

분주한 저물녘

어머니

 

 


 

서정춘 시인

1941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 매산고등학교를 졸업.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단. 시집 <죽 편> <봄, 파르티잔> <귀> <하류> <물방울은 즐겁다> <캘린더 호수> <이슬이 사무치다>. 2001년 박용래문학상. 2004년 제1회 순천문학상 수상. 최계락문학상, 유심작품상, 백자예술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