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숙 시인 /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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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 시인 /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죽은 자와 산 자가 한 지붕 아래 동거하는 섬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당신은 오래 쓴 시를 숨어서 읽고 있었습니다 혼자 쓰고 혼자 지우는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은 늘 등이 굳어 있고 매사 다정하기가 힘듭니다 쓰다가 멈춘 문장을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검은 모래 해변을 함께 걸으며 저녁이 오면 세상의 온갖 색을 거두어들이는 빛의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떻게 죽고 싶냐는 질문을 한 적은 없지만 시인은 죽어 가는 얼굴을 붉게 감추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시는 희망이 있는 걸까요 주목나무 아래 앉아 우리가 함께 읽지 못한 시를 혼자 낭독합니다 우리의 낭독회는 아무 관객이 없고 죽은 당신만이 박수를 쳤습니다 -시집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
채인숙 시인 / 1989
대학 도서관에서 가끔 책을 훔쳤다 바코드니 전자출입증 따위는 없던 호시절이었다 스웨터 안쪽 바지춤에 시집을 두 권이나 꽂고 호기롭게 팔짱을 끼고 도서관을 나왔다 문학하는 길을 가르쳐 준다길래 대학을 갔는데 존경할 만한 스승도 없고 가슴 뛰는 수업도 없었다 다행히, 아까운 등록금을 조금이라도 보전하려면 책이라도 훔쳐야 한다고 가르쳐 준 친절한 선배가 있었다 지금도 내 책꽂이엔 대학도서관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힌 누런 시집 몇 권이 무슨 전리품처럼 꽂혀 있다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맹랑한 도둑년이었다 김수영과 최승자는 늘 선수를 빼앗겼다 그때도 분했는데 지금도 분하다 아직도 버릇을 못 고치고 번번이 훔쳐 쓸 궁리를 한다
채인숙 시인 / 냉장고가 없는 야채가게
그 도시의 야채 가게에는 냉장고가 없고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는 길이 이어져 있다
가게 안에는 종종 밀림에서 탈출한 바퀴벌레가 엄지손가락만 한 날개를 털며 손님 어깨 위로 날아오른다
손님들은 무심한 얼굴로 바퀴벌레를 탁, 바닥으로 쳐내린다
냉장고가 없는 야채 가게의 나무 매대 위에는 말을 참는 것이 습관이 된 여자들이 나란히 누워 있다.
양말을 신어 본 적 없는 발꿈치엔 물기 걷힌 뿌리야채처럼 주름이 쪼그라져 있다
여자들은 표준어를 쓰지 않고 같은 냄비를 주문하는 모임에 이국 여자를 초대하지 않는다
해가 저물면 나는 낮잠에서 깨어 누렇게 시들어 가는 파 한 단과 꼬리가 말라 가는 당근을 사 들고 인도와 차도의 사라진 경계를 걸어 집으로 간다
시든 파뿌리를 골라 스티로폼 화단에 꽂는다
도시에는 오래전부터 비가 오지 않는다
채인숙 시인 / 나무어미* 술라웨시 섬 깊은 숲속에서 아이는 죽어서도 자란다 사람의 젖을 받아먹으며 신의 언어를 전하고 잇몸에 뼈가 돋기 전에 살과 피의 무늬를 거두었으나 나무어미의 몸에 사각침대를 들여놓고 순한 입술을 흔들어 부르는 자장가를 들으며 자란다 살아 본 적 없는 생은 여태 모두의 것이므로 모든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만의 대문을 가져야 하므로 눈을 감고 천천히 나무가 되어 자란다 저도 어미가 된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따나토라자에는 아직 이가 나지 않은 아이가 죽으면 큰 나무의 몸통을 파서 무덤을 만들고 아기를 묻는 풍습이 있다.
채인숙 시인 / 아홉 개의 힌두사원으로 가는 숲 숲은 산길로 이어진다 오늘도 신의 이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어느 길에나 당신이 있고 어느 길에도 당신은 없다 돌멩이로 쌓은 층층의 기도문은 자바의 처녀가 억새풀 같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말을 몰아 전하려던 몇 통의 편지와도 같았지만 어떤 시절의 편지도 아직은 수신이 없음 아홉 개의 힌두사원이 있는 산길을 신의 등허리를 타고 오른다 나를 놓치지 말아 다오 사람들은 외롭지 않겠다고 사원을 지었던 거란다 두려운 것은 신이 아니라 외로움이거든 함부로 사랑하고 함부로 미워하였지만 한 번도 믿은 적은 없었던 이름이여 어떤 사랑도 다시는 나를 불러 세우지 말아 다오
채인숙 시인 / 출국
이제 가 보려구요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들키지 않으려구요
만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녕, 하는 말은 비행기를 닮았어요 날렵하고 매끄러운 금속 같아요
언제부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방방곡곡 병실에 누워 작별의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없는 동안에도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우리는 이미 다정한 비밀을 나누어 가졌어요
물로 닦으면 숨은 글자가 드러나는 옛날 문서처럼 그것은 나의 출입국증명서에 은밀히 기록됩니다
이제 비행기를 타려구요 낡고 지친 마음은 들키지 않으려구요
몇 권째인지 모를 푸른 여권을 들고
당신이 잠든 사이 나는 다녀오겠습니다
― 『여름 가고 여름』,민음사, 2023
채인숙 시인 / 다음 생의 운세
다시 태어나면 살던 마을을 떠나지 않으리 지붕 낮은 집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을 지나리 뒷산에서 주워 온 나무 둥치로 의자를 만들어 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앉아 먼 나라의 당신이 보내온 엽서를 읽으리 내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 아이들을 낳아 늦가을 별 같은 곁을 내어 주리 사랑에 실패하고 우는 아이 옆에서 함께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리 누군가 떠났고 누군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천변에서 들으리 혼자 기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내 어린 날의 바닷가 마을에 다시 태어난다면 수심을 헤엄쳐 바위 틈에 낀 성게를 줍는 해녀가 되리 봄 쑥을 캐고 생미역을 잘라 먹으며 웃는 날이 많으리 쉬는 날에는 문구점에 들러 색 볼펜을 고르고 책상에 앉아 밑줄을 그어 둘 문장을 찾으리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 먼 당신에게 편지를 쓰리 어릴 적 사투리를 고치지 않으리 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리 꿈에 속아 짐 가방을 싸는 일은 다시 없으리 나무캥거루와 쿠스쿠스의 서식지를 멀리서 그리워만 하리 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었으므로
― 『여름 가고 여름』,민음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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