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원선 시인 / 마네킹 협주곡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5. 08:00
정원선 시인 / 마네킹 협주곡

정원선 시인 / 마네킹 협주곡

 

 

얼마 전 남편을 잃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초로의 여자를 대형 아울렛 매장에서 우연히 보았다

남자 셔츠를 입은 마네킹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여자를-

셔츠를 보고 있는 건지

마네킹을 보고 있는 건지

남편이 그리운 건지, 야속한 건지

구분이 잘 안 가는 한 여자를-

 

그러다가 그녀가 바로 앞의 마네킹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네킹이 오히려 피곤한 기색을 띠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심전심으로 서로가

유체이탈로 넘나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 또한 이 변화에 동참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손에 든 바지를 가리키며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

바지 많잖아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그 여자를 쳐다본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한 여자를-

 

가족밖에 모르는 아내도

훗날에 저러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주위의 마네킹들이 내 분신 같기도 하고 오랜 친구 같기만 한 것이다.

 

 -시집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 에서

 

 


 

 

정원선 시인 / 나비의 묘비명

 

 

당신이 그려준 동굴 속을 울면서 걸어간다

캄캄하다고 외치기보다는 물방울 소리가 내는

똑똑한 발자국을 받아 적는다

 

울음소리가 초음파로 거듭나는 동안  

박쥐의 촉수에서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소원해진 우리의 관계는 두 발로 기어 다닐 것이다

 

이역만리서 기억의 미생물에게 응급처치해주고 있는 옛 애인에게

지하수의 기운을 적셔주고 싶다

슬픔을 조종하는 석순도 함께 보내주고 싶다

 

조금 전 당신의 돌기둥 속에서 도망친 기분이랄까?

 

애욕의 수첩을 꺼내는 그대에게

과거의 유혹을 물리칠 유전자를 물려주고 싶다

 

세계가 만일 황금빛 유혹이라면

동굴의 젖을 빠는 어린 양에게

잃어버린 죄의식을 되찾아주고 싶다

 

첫발을 내딛는 당신의 붓질 사이,

울려 퍼지는 나비의 비명​에

조그만 입을 열어도 향기는 새어 나오지 않는다

 

나비의 비명은 묘비명으로 쓰여

꽃가루를 전하고 다닐 것이다​.

 

 


 

 

정원선 시인 / 매달릴 수 없는 나무에서 태어난 방울토마토

 

 

울음을 동글동글 말면 나이테가 되네

참을 수 없이 웃고 나면 한 뼘 나무가 자라네

제멋대로 매달린 재기발랄한 방울토마토

 

글자만 먹고서도 살아갈 수 있네

숨을 쉬지 않아도 되네

뿌리의 풍속을 위해서는 언제든 붉은 관복도 벗을 수 있지

 

한시도 제자리에 있는 법이 없지

꿈에서는 물 위에 둥둥 떠서 지내고

현실에서는 이리 저리 굴러다니며 궁시렁대네

 

소원은 자라난 나무의 성씨를 온전히 물려받는 것

그 집 화분 족보에 피어나는 것

 

동그란 체구를 가진 우리들의 운명은

달의 홈플레이트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지

빠른 직구도 아닌 투심 패스트볼 체인지업을 써서

달의 미트 속에 던져봐야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알 수 있지

 

벌레 먹은 이파리에서

달빛 먹은 이파리까지 도루를 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살아야 제 맛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게 구르고 굴러 세이프가 될 때까지

입술이 부르트도록

슬라이딩 연습을 해야 하네.

 

-《모:든시》 2019. 겨울호

 


 

 

정원선 시인 / 스테인드글라스 2

 

 

 죽은 그녀는 하늘의 별사탕처럼 닳아진다. 잊히지 않는 과거는 때로 여러 빛깔을 가진 유리창을 선망한다. 전설이라 부르기에 화려한 반신불수의 희망은 간성혼수를 앓는다. 그녀는 피를 다 쏟아붓는 성의를 보이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 바닥에 딱 달라붙은 당신의 발바닥이 끝내 눈물겹다. 잊으리라 무덤을 만들고, 떠나보내리라 제사를 지낸다. 갈 때마다 무덤은 사놓은 꽃을 시들게 한다. 새로 산 병풍은 병든 아내를 더 아프게 한다. 여러 빛깔을 가진다는 것 은 갱년기를 앓는다는 것.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사랑과 그리움은 무의미하게 사라져 간다. 꼬리가 달린 햇빛을 안고 눈물을 흘린다. 말을 못 하는 것들은 죽어서 빛이 될 것이다. 죽은 그녀는 말을 듣지 못해 빛을 주렁주렁 단 유령이 될 것이다. 떠돌던 빛은 여러 성깔을 가진 유리창을 통과해 신의 아들에 도달한다. 빛의 정물들이 바람의 신도들 앞에서 한껏 되살아난다. 유령과 유령 사이에는 영혼 같은 빛이 통과한다.

 

 


 

 

정원선 시인 / 컵 속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건

 

 

1

머리카락 몇 올

컵 속에 빠졌다

 

고통에 몸서리 치는 걸 보면

저렇게

몸을 흐느적거릴까 싶은데

가슴으로 옮겨와 또다시 허우적거린다

 

자세히 보니 저수지에 빠져 죽은

뇌성마비 형이다

 

온 몸이 상처투성인 천둥이

번쩍하고 저수지의 갈비뼈를 가른다

 

오늘 밤은 구름에 오줌으로 지도를 그리지 않으리라

머리카락

몇 올 빠진 달님에게 야단맞지도 않으리라

 

2

컵 속에 찻잎들

아우슈비츠 시체처럼 포개져 있다

 

하얀 컵 바탕에 검은 눈 내린다

귀 잘린 강아지 껑충껑충 잘도 뛰어다닌다

 

넋이 나간 그림자

우두커니 서서 팔뚝으로 피에 젖은 두 눈을 닦고 있다

 

컵이 우물처럼 자란다면

찻잎들이 첫 생리를 시작하리라

 

순결한 두레박이 이끼 덮인 시체들을

깊은 바닥에서 퍼 올려 훌륭하게 손잡이로 키우리라.

 

 


 

 

정원선 시인 / 작은 불륜

 

 

미련에게서 음담패설을 배우죠

너만 알아야돼로 시작하는 달달한 말

솔직한 사람에게는 미련은 쥐약이죠

 

유리창을 가지려면 미련이 필요하죠

최대한 쉬운 풍경을 가진 유리창 말예요

미련이 필요한 사람은 꼬리뼈에 손잡이를 달아야 하죠

 

우습게 들리겠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도 골대 안에서 떠돈대요

영리한 사람은 미련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요

그냥 모른 체하고 갈 길을 갈 뿐이죠

 

미련은 핸드크림과 같아요

마음의 피부가 건조해지고 거칠어질 때 찾는

오래된 핸드크림

 

미련의 문이 활짝 열려있을 땐 청소를 해요

물걸레질을 하고 나면

거실 액자 속 벚나무의 웃음이 들리곤 해요

울음소리로 불안할 때도 있지만 말예요

 

미련에게서 떠나고 싶을 때는 뒷짐 지고

자기 색깔로 불을 밝힌 복도를 걸어요

가끔 복도 끝에 고무나무와 사랑에 빠지고 싶을 때도 있죠

 

사실 미련은 저만의 작은 불륜이에요

꿈을 꾸고 나서도 잊히지 않는 불륜 말예요

 

 


 

 

정원선 시인 / 술 취한 목소리는 안개를 갖지 못한다

 

 

통닭집 처마 밑에는 버려진 라이터와 담배가

 

바람의 이불을 걷어차고 누워있다

한 대 피우고 싶은 마음도 곁에 누워 한 식구가 된다

 

누군가의 외침을 듣고 뿌옇게 실비가 온다

낙엽들의 불면증이 웅덩이 속을 떠돈다

 

두고 온 죄과들은

돌아오는 봄 가지에서 망울망울 피어날 것이다

부끄러워할 건 없다

사는 게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고 야리야리해서는 안 되니까

 

자동차 불빛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빗방울 소리가

웅덩이 무의식을 헤집는다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번져 풍차처럼 돌아간다

 

돈키호테 같은 바람이 얼굴에 인상을 쓰고

죽어가는 벚나무 등걸에 가볍게 올라탄다

 

술에 취한 목소리는 안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아끼던 줄거리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2019년 계간 <시로여는세상>신인 당선작 중에서

 

 


 

정원선 시인

1971년 광주에서 출생, 국립세무대학 졸업, 광주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詩부문 등단, 2019년 《시로 여는 세상》 하반기 신인상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