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순희 시인 / 정도리 갯돌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5. 08:00
이순희 시인 / 정도리 갯돌

이순희 시인 / 정도리 갯돌

 

 

먼 생애 염분을 끌고 온

파도

자갈자갈

몸 돌려 염증을 빼는 소리

 

갯메꽃은 곁에서

해맑은 눈빛

누군가 쌓아 놓은 돌탑 사이로

아스라이 들려오는

긍정,

 

닳아도 닳아도 갈등의 염분 말려야 하는

나 닮은

햇살 안은 갯돌

 

 


 

 

이순희 시인 / 그냥

 

 

치렁치렁한 변명도 필요 없고

날 선 긴장감도 없는

몸빼같이 헐렁한 ‘그냥’이라는 말

 

이 헐렁한 말의 옷 한 벌

머리맡에 걸어두었네

 

어느 하루 아득한 날

그 치장기 없는 말의 옷을 입고

당신을 찾아 갔네

그냥이라고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나에게

당신은 고개를 끄덕여 주네

긴 시간 너머를 다 이해한다는 듯.

 

 


 

 

이순희 시인 / 내 안에 상처 받은 아이가 있어

 

왜 꿈만 꾸면 아기가 되는 꿈을 꾸는지

어느 날 밤엔 내가 엄마를 불러 보았어

엄마 ! 엄마!

모깃소리만큼 작게 불렀는데도 선명하게 잘 들렸어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 목소리는 딸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꼭 빼닮았어

 

난 엄마 얼굴을 몰라

엄마는 내가 세 살 때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

입 크게 벌리고 달려든 호랑이한테 잡아먹힌 거야

난 그 호랑이가 무서워 엄마를 부르며 울지도 못하고 살아왔어

 

내게 엄마는 너무나 깜깜해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때 난 겨우 세 살이었거든

그런데 그렇게 깜깜한 엄마를 불렀더니

내 안에서 자라지 못한 채로 웅크리고 있던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나왔어

밤마다 내 꿈속에서 울기만 하던 아기였어

그 아기가 엄마를 부르며 걸어 나온 거야

 

내 속의 아기가 내 목소리를 빌어

엄마 ! 엄마 ! 부른 거야

 

 


 

 

이순희 시인 / 장미

 

새벽 아파트 베란다

한 송이의 장미가 피어나고 있다

 

사시사철 싱싱한 잎을 달고 있는

실내목들의 당당한 어깨 아래

한쪽 귀퉁이 외진 곳에서

이름도 잊혀진 채 흉한 몰골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것이

오늘 이른 새벽

붉은 심장 한 덩이를 피우고 있다

언제 뽑힐지 모르는

굴욕의 세월을 삼키며

그는 밤마다 자신을 비추는 먼별을 바라보며

지난 하루 무사히 건너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기도라도 한 것일까

오래 기다린 가지 끝에 꿈이 돌아오듯이

드디어 여린 줄기 끝에서

피를 토하듯 피어나는 한 송이

오욕도 오래 삭여 견디면 저렇게 찬란하게 열리는 걸까

 

 


 

 

이순희 시인 / 시를 찾아가는 독도법

 

너를 찾으러 가는 밤이면

또각또각 걸어가 당당히 맞고 싶은데

어디에도 너는 보이지 않고

꼭 있을 듯한 지점엔 구름들만 흩어져 있네

5만 분의 1로 축소된 지도는

손금 보듯 환히 보이는데

너에게 이르는 길은

미로처럼 얽히고 확대경으로도

네 주소는 보이지 않네

나는 절뚝이며 찾아가고

너는 떠돌다가

어느 날 딱 한번만이라도

여름 중천에 쏟아지는 소나기로 만나

가슴속 묻어둔 먹구름 왈칵왈칵 토해내며

부딪히고 깨지며 바다로 흐르고 싶은데

아직, 너는 오리무중이고

길은 무표정한 몸짓으로 커서만 깜빡거리네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 중에서

 

 


 

 

이순희 시인 / 흉내

 

 

시를 글자로 쓰다가

이 글자

저 글자

맞추다가

지우고

다시 써 넣고

클릭 한번으로 쉽게 지우고

이리저리 조합을 맞추다가

맘에 안 들면 우루루 지우고

수십 번을 반복하는데

 

그 옛날

마음이 종이가 되어

마음에 시를 새겼던 시인이

네가 시인 흉내를 내는 것이냐?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간다

 

 


 

 

이순희 시인 / 세월의 눈치를 보다

 

세월의 눈치 보게 되네요

이 행성에 곁방 얻어 살면서

보증금으로 시간을 걸어두었죠

한 해 두 해 야금 야금

보증금 깎이고 있어요

흐르는 시간은 무자비하여

절대 인정 베풀지 않아요

그 비위 맞추려

흰머리 염색도 하고

눈썹 문신도 하고

젊음을 준다는 시술도 하고요

그래도 시간은 본체만체라

그놈의 발목 잡고 애걸복걸

얼마를 더 살아야 이 철없는 짓

그만 둘 수 있을까요

벌써 입춘 지났으니

봄 꽃 흐드러지게 피겠지요

한 철가고 한 철 오겠지요

세월 깜빡 잊고

이 행성의 주인인체

봄꿈에 젖게 되겠지요

춘몽에서 깨어나면

철은 조금 더 들겠지요?

 

 


 

이순희 시인

경북 문경 출생. 단국대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기독교 상담학과 졸업. 2002년 『심상』으로 등단. 가곡 독집 『어디로 가는 가』 『2월, 그 간이 역에서』 『그냥』 『산 그림자』 등. 시집 『꽃보다 일으로 남아』. 2016년 동국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