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희 시인 / 정도리 갯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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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희 시인 / 정도리 갯돌
먼 생애 염분을 끌고 온 파도 자갈자갈 몸 돌려 염증을 빼는 소리
갯메꽃은 곁에서 해맑은 눈빛 누군가 쌓아 놓은 돌탑 사이로 아스라이 들려오는 긍정,
닳아도 닳아도 갈등의 염분 말려야 하는 나 닮은 햇살 안은 갯돌
이순희 시인 / 그냥
치렁치렁한 변명도 필요 없고 날 선 긴장감도 없는 몸빼같이 헐렁한 ‘그냥’이라는 말
이 헐렁한 말의 옷 한 벌 머리맡에 걸어두었네
어느 하루 아득한 날 그 치장기 없는 말의 옷을 입고 당신을 찾아 갔네 그냥이라고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나에게 당신은 고개를 끄덕여 주네 긴 시간 너머를 다 이해한다는 듯.
이순희 시인 / 내 안에 상처 받은 아이가 있어
왜 꿈만 꾸면 아기가 되는 꿈을 꾸는지 어느 날 밤엔 내가 엄마를 불러 보았어 엄마 ! 엄마! 모깃소리만큼 작게 불렀는데도 선명하게 잘 들렸어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 목소리는 딸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꼭 빼닮았어
난 엄마 얼굴을 몰라 엄마는 내가 세 살 때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 입 크게 벌리고 달려든 호랑이한테 잡아먹힌 거야 난 그 호랑이가 무서워 엄마를 부르며 울지도 못하고 살아왔어
내게 엄마는 너무나 깜깜해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때 난 겨우 세 살이었거든 그런데 그렇게 깜깜한 엄마를 불렀더니 내 안에서 자라지 못한 채로 웅크리고 있던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나왔어 밤마다 내 꿈속에서 울기만 하던 아기였어 그 아기가 엄마를 부르며 걸어 나온 거야
내 속의 아기가 내 목소리를 빌어 엄마 ! 엄마 ! 부른 거야
이순희 시인 / 장미
새벽 아파트 베란다 한 송이의 장미가 피어나고 있다
사시사철 싱싱한 잎을 달고 있는 실내목들의 당당한 어깨 아래 한쪽 귀퉁이 외진 곳에서 이름도 잊혀진 채 흉한 몰골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것이 오늘 이른 새벽 붉은 심장 한 덩이를 피우고 있다 언제 뽑힐지 모르는 굴욕의 세월을 삼키며 그는 밤마다 자신을 비추는 먼별을 바라보며 지난 하루 무사히 건너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기도라도 한 것일까 오래 기다린 가지 끝에 꿈이 돌아오듯이 드디어 여린 줄기 끝에서 피를 토하듯 피어나는 한 송이 오욕도 오래 삭여 견디면 저렇게 찬란하게 열리는 걸까
이순희 시인 / 시를 찾아가는 독도법
너를 찾으러 가는 밤이면 또각또각 걸어가 당당히 맞고 싶은데 어디에도 너는 보이지 않고 꼭 있을 듯한 지점엔 구름들만 흩어져 있네 5만 분의 1로 축소된 지도는 손금 보듯 환히 보이는데 너에게 이르는 길은 미로처럼 얽히고 확대경으로도 네 주소는 보이지 않네 나는 절뚝이며 찾아가고 너는 떠돌다가 어느 날 딱 한번만이라도 여름 중천에 쏟아지는 소나기로 만나 가슴속 묻어둔 먹구름 왈칵왈칵 토해내며 부딪히고 깨지며 바다로 흐르고 싶은데 아직, 너는 오리무중이고 길은 무표정한 몸짓으로 커서만 깜빡거리네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 중에서
이순희 시인 / 흉내
시를 글자로 쓰다가 이 글자 저 글자 맞추다가 지우고 다시 써 넣고 클릭 한번으로 쉽게 지우고 이리저리 조합을 맞추다가 맘에 안 들면 우루루 지우고 수십 번을 반복하는데
그 옛날 마음이 종이가 되어 마음에 시를 새겼던 시인이 네가 시인 흉내를 내는 것이냐?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간다
이순희 시인 / 세월의 눈치를 보다
세월의 눈치 보게 되네요 이 행성에 곁방 얻어 살면서 보증금으로 시간을 걸어두었죠 한 해 두 해 야금 야금 보증금 깎이고 있어요 흐르는 시간은 무자비하여 절대 인정 베풀지 않아요 그 비위 맞추려 흰머리 염색도 하고 눈썹 문신도 하고 젊음을 준다는 시술도 하고요 그래도 시간은 본체만체라 그놈의 발목 잡고 애걸복걸 얼마를 더 살아야 이 철없는 짓 그만 둘 수 있을까요 벌써 입춘 지났으니 봄 꽃 흐드러지게 피겠지요 한 철가고 한 철 오겠지요 세월 깜빡 잊고 이 행성의 주인인체 봄꿈에 젖게 되겠지요 춘몽에서 깨어나면 철은 조금 더 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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