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용훈 시인 / 별 아니면 벌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5. 08:00
최용훈 시인 / 별 아니면 벌

최용훈 시인 / 별 아니면 벌

 

 

벌들이 노동을 하는 한낮

함양 산수유 마을에 갓 생겨난 노란 은하수가 흐른다.

별이란 이름은

벌들이 주둥이를 박았던 침구멍들이 있어서 붙여졌을지도 모른다.

쭈그러든 달이 다시 탱탱해진 밤길을 걷는데

축 처진 늙은 엄마 젖가슴이 생각난다.

삭막한 세상살이에 목 탈까봐

가슴에 쌍봉낙타처럼 혹을 매달았다가 수유를 해줬던,

그 가죽물주머니 마개에도 침구멍들이 있었다.

밤하늘에 활짝 핀 보름달에 침구멍들이 보인다.

어쩐지 달빛이 고소했다.

흡혈은 모계로 유전되는 불치병이요

침구멍은 내 가슴앓이의 시원(始原)이다.

병이 도져 엄마 피를 빼먹을 때면

흡혈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내 몸에 내가 화가 났었다.

내 전생은......, 벌이었나보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참을 만하다.

‘사는 게 어째 벌 받는 것 같으냐’는

노모의 푸념만은 견디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푸념을 밑거름으로 줘야

내 삶이 그나마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데야.

 

 


 

 

최용훈 시인 / 고백

 

 

인적 드문 밤거리에서

황색신호등이 왔다갔다 망설이자

입꼬릴 치켜 뜬 달이

실행하지 못하는 생각 속의 간음을 비웃었다

스쳐만 가도 눈에 확 띄는

거리의 여인들처럼 눈에 들어온

네온십자가는 그런 밤을 지겨워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더 늦기를 기다리던 소음騷音이

비좁은 역전 골목까지 찾아와

흔한 이름들을 마구잡이로 불러제끼자

열린 여인숙 창문으로

입냄새 같은 안개가 밀려들었다

 

긴장하는 것은

전조등 불빛으로 두터운 어둠에 터널을 파며

앞차의 붉은 후미등을 따라가는

자동차들만이 아니었다

불발된 격발음같이 분출된

후덥지근한 내 어떤 기억이 그랬다

 

이날 밤도

표독스럽게 검붉은 꽃잎은

벌다말고 그냥 시들었다

이후

나의 모든 조바심이 시작됐다

 

 


 

 

최용훈 시인 / 물의 집합방정식

 

 

 가시가 온몸을 파고들어도 고요한, 연못을 본다. 고요에는, 마음이 숙연해지는 치명적 성분이 있다. 숙연함은 의심을 기도로 바꾸려는 연금술 같은 것, 이해불가의 고행을 하는 연못에 대해 경배심이 들게 만든다. 그러나 몸의 태반을 가시연잎으로 감싼 이 연못도 열 길 물속은 훤히 들여다봐도 사람 속은 모를 텐데, 별들의 천국이 지옥 같은, 내 심정을 무슨 수로 읽어 태양계의 유일한 오아시스를 수면에 비춰주는 것인가.

 속을 알 수 없으면 의문스러워 보이는 건 깊이에는 감추려는 속성(屬性)이 있기 때문이다. 저 연못이 물을 끌어 모아 깊이를 획득한 것은 부정형(不定形)인 저의 본질을 감추려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더 음흉하다는 생각이 들어 유심히 들여다본 것인데, 연못이 시치미를 떼며 낯 두꺼운 내 모습을 깊이가 없는 입체로 되비쳐 보여준다. 너의 몸도 물의 요소로 채워져 있어 네 그림자에 깊이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 암시하는, 이 물의 집합방정식이 자아를 푸는 열쇠라는 것을 알고서야 그동안 깊이도 없이 깊이를 보여주는 거울의 참 같은 거짓을 참으로 인식하는, 잘못을 범해왔다는 것을 안다.

 

 정신은 시인된 자세로 살고자하면서도 마음과 몸은 여전히 깊이와 상(像)이 겉도는 세상에서 전전긍긍하는, 내 작태가 한심한지 그림자 없는 바람이 연못에 고인 구름즙을 냅다 걷어찬다. 지상에 붙박인 연못물에 촘촘히 가시를 박고 부동(不動)하던, 가시연잎들이 출렁출렁 부유한다. 순간, 가시연이 물의 기질을 변혁, 상승시켜 연화세계(蓮花世界)*를 펼쳐보여도 세상은 허공에 떠있는 부동체(浮動體))라서 부동(不動)의 정의는 정의되지 않는다.

 문득, 같은 객관적상관물**이더라도 화자(話者)마다 객관객체***가 달라서 시는 정형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쾌해졌지만, 언어자체는 깊이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시편들에서 삶에 대한 어떤 깊이가 느껴진다 해도 시어가 축조하는 이미지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림자만으로 실체(實體)를 어찌 알 수 있는가. 그러니 나여, 대강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음을 직시하라.

 

*불교에서 극락을 이르는 말

**시에서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찾아낸 사물, 정황, 사건을 이르는 말

***감각 사유 의지 따위의 모든 주관이나 주체의 작용대상이 되는 객체를 이르는 말

 

 


 

 

최용훈 시인 / 나무학-父

 

 

성동세무서 앞 도로변

플라타너스들이 베어지고 있다

몸통만 남은 몰골들이 볼썽사나워

베어내는 이유를 물었다

돌아오는 벌목책임자의 대답이

가로등 불빛을 가린다는 것

 

가로등보다 키가 크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니

유예기간을 달라고 플라타너스들이 통사정 했을 텐데도

그들은 가로수들이 가로등의 턱 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다

또 문명은 그렇게 좀 무자비해야

가로수들이 서슬 푸른 그늘을

무럭무럭 키운다는 것을 아는 거겠지……

 

정리 해고된 뒤

모가지 떨어진 애비 父자를

넋 놓고 들여다보던 때가 떠올라

베어지는 순간의 심박파동이 고스란히 남은

나무의 몸속을 오래 들여다봤다

 

 


 

 

최용훈 시인 / 장봉도 시편1

-이어도를 보다

 

 

설비 일을 하는 곽 씨는

신 맛이 나는 건 일절 못 먹는다

그러나 쓴물만큼은 꿀물인양 들이켜는 두주불사다

그런 곽 씨의 하루일과를 끝낸 몸에서

신 내가 풀풀 날렸다

 

쓴물을 짠물로 중화(中和)시킨 뒤

다시 신물로 발효시키는 생활은

아무나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닐 터

 

집수리 하느라 수고했다고

집 주인 장 씨가 숭어회를 한 턱 냈다

저마다 초고추장에 버무린 회를 먹으며

서로의 노고를 한마디씩 거드는데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지

곽 씨는 깡 소주만 그냥 들이켠 뒤

카악! 소리를 내뱉는다

 

그날 저녁 곽 씨의 얼굴 위로

짠물이 빠지면 쓴물에 잠기고

쓴물이 빠지면 짠물에 잠기는 섬이

언뜻언뜻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최용훈 시인 / 윤회론

──오류 서序

 

 

빗물고인 웅덩이에

잠자리 한 마리가 얼굴을 담그고 있다

물 속에 산란한 알들을 살피려고

그 큰 겹눈을 뜨고 있는가 했더니

죽어있다

열십자로 물 위에 한가롭게 펼쳐 논

날개가 반짝이는 걸로 보아

죽는 순간

잠자리는 제 태생지胎生地가 떠올랐으리라

 

며칠 전 저수지에 빠져 죽은

그의 태생지도 물 속이므로

얼굴을 물에 담그고 양팔을 벌린 채

둥둥 떠 있었으나

물 밑에서 발목을 잡아당길 때 문득

저를 수장시키지 않고

땅에 묻어버릴게 두려웠던가 보다

표정이 공포에 질려있었다

 

다시 물로 돌아가서

어머니 뱃속에서처럼 발을 차대며

(이때 물결이 출렁이는 것이다)

환생하려는 사지를

묶여서 매장당해야 하는 것은

암만 생각해도 무서운 일이구나

 

반쯤 뜬 눈으로

푸르고 깊은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도

물 밖으로 나와서

기를 쓰고 두 발로 기립했다

아주 쓰러져 누우면

어느 누구도

발붙였던 땅에는

 

영영 눈길을 주지 않는 것도

다 그래서였구나

 

그러니 탯줄 기어코 끊고

둥근 물집을 뛰쳐나오는 불찰을

범한 나 죽거든

눈 내려 감기지 말고

후회하는 모습 그대로

제발 엎어 묻어다오

 

그럼

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릴 찾아

수수 천년 동안

암흑뿐인 무저갱을 헤쳐 나가서

껍데기마저 탈피해

잠자리날개 얼개 뼈 같을 뼈마디들을

말갛게 헹군 다음

가볍게!

날갯짓 쳐 환생해 보리

 

 


 

 

최용훈 시인 / 바닥까지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살면서 결코 겪지 말아야 할 고통에

빠졌다는 뜻이라면 왜 굳이 ‘바닥’까지

간다는 표현을 쓰는 걸까?

최악의 상황, 최악의 절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면

그 ‘최악’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이 인생 최악의 순간임은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인가?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가혹하고 견뎌낼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고통이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는가.

시인은 왜 ‘바닥의 바닥’이라는

언어논리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가?

바닥이 끝이라면 어떻게 그 바닥의 바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저런 상념 끝에 ‘바닥’이란 표현은

그저 버티기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바닥의 바닥’이란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늪에 다시 빠지고

말았다는 뜻의 에두른 표현일 것이다.

 

시인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겠지.

그 고통의 길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저 겪을 만큼 겪어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래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니까.

그 바닥은 결코 발에 닿지 않는 것이겠지.

그저 허공에 발버둥 치다가 벗어나는 것이지.

그 순간 바닥을 치고 일어섰다고 믿는 것이겠지.

가장 깊은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닥이 없다고 말한다.

고통의 심연은 끝이 없으니 존재하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그저 애써 다시 솟아올라 돌아온 것이니까.

선문답 같은 ‘바닥’ 이야기를 몇 번이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스친 한 가지 생각이 있다.

‘인생에 바닥은 없다. 그저 어려움에 부딪혀

자신이 바닥까지 갔다고 생각할 뿐이다.

없는 것이니 보이지도 않지만 있다고

생각하니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바닥까지 갔다는 생각에 고통 받고 있습니까?

어디까지가 바닥일지 알 수 없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습니까?

바닥은 없습니다. 발에 닿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지금이 바닥이라고 생각하고 솟아오르세요.

다리에 힘을 주고 허공을 날아오르세요.

있지도 않은 바닥을 기다리지 마세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최용훈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경기상고 졸업. 2007년 국제펜클럽 펜 문학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08년 〈애지〉 신인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 2009년 시 「갈등」이 서울시 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공공장소 게시 시로 선정됨.. 시집 『소리의 원근법』 『날개가 필요하다』(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