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예영 시인 / 달집에 대한 풍문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5. 08:00
윤예영 시인 / 달집에 대한 풍문

윤예영 시인 / 달집에 대한 풍문

 

 

달이 상자로 들어간다

상자에 불을 밝힌다

떠오른다, 검불처럼, 티끌처럼

 

달로 간다

달로 간다

달로 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달맞으러 간단다

(쇠사슬을 끌고)

달맞으러 간단다

(발걸음도 가벼웁게, 달로 가는 길)

저마다 머리에 달을 이고

(프로메테우스도 아닌 것들이!)

정수리로 달을 밀어 올리며

(철그럭 철그럭)

달맞으러 간단다

(발꿈치를 조금, 아주 조금만 들고)

그곳으로 간단다

(쇠공이 발목을 당기는 힘으로)

 

 


 

 

윤예영 시인 / 귓속의 하루

 

 

달팽이관에 앉아 느릿느릿 귀 기울입니다.

 

수챗구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

변기에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세상 끝으로 떨어지는 이과수폭포

 

비가 옵니다.

세상은 무한팽창 우주처럼

혹은 이스트를 넣은 봄처럼 부풀어오르고

오늘도 반가운 귀울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언저리에도 닿지 못한 멋쩍은 부름들,

그런 것들은 죄다 파도에 밀려 돌아옵니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집니다.

부서진 이름들을 하나씩 쓰다듬어봅니다.

 

달팽이관에 앉아

몸을 말아봅니다.

느릿느릿 곱아드는 것은

깊숙이 뿌리내리는 일입니다.

그건 사실

사막을 그리는 바다가

불 속에 작은 손을 담그는 일입니다.

 

저기 세상 끝의 커다란 구멍으로

큰 바다가 떨어집니다.

 

 


 

 

윤예영 시인 / 꽃은 노랗다

- 산에는 꽃이피네, 갈봄여름 없이

 

 

노란 꽃이 철책을 붙들고 섰다

철책 안은 공터였다

10년쯤 전엔

지금은 주차장

넝마를 뒤집어쓴 알코올중독자 같은

세상을 노려다보는 아이 같은

하지만 그저 노랄 뿐

왜 저러고 섰을까

꽃이

 

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지나간다

고양이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건 고것의 배가 불룩하기 때문

아니면 그냥 고양이이기 때문

고놈의 뱃속엔 대체 몇 마리나 들어 있을까

그러나 물웅덩이에 빠진 하늘에 입이나 축일 뿐

고양이니까

꽃이 노랗듯

자꾸 노란 대궁을 흔들며 누굴 부르고 있다

비명을 지른다

비명을 지르는 꽃이라니!

비명은 언제나 외마디

어! 아! 악!

그러나 꽃은 노랄 뿐

그건 꽃이니까

하늘이 무심하듯

 

비 온 뒤 하늘은 무심하다

임계점을 넘어선 에너지는 어디론가 분출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들 한다

정말?

사실 하늘은 언제나 무심하다

빌어먹을 하늘이니까

꽃이 노랗듯

-월간 『현대문학』2009년 3월호 발표

 

 


 

 

윤예영 시인 / 소녀시대

 

 

 그 여자도 한때는 소녀였겠지 선생님이 옛날이야기를 시작하면 50명의 아이들은 동시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 여자도 틀림없이 소녀였을까? 내가 소녀였을 때, 너희들처럼 소녀였을 때 학교 가는 길은 너무 멀었어 너무 멀고 딱딱해서 학교에 도착하면 발에 피가 흥건했지 우리들은 작고 예쁜 귀를 팔랑거리며 수군댔다 조용히 해! 너희들은 은쟁반 위의 노란 병아리들이야 수염이 긴 고양이를 조심해야 해 발에 피가 나도록 학교에 갔는데 종이 울리면 얼마나 분하고 쓸쓸하던지… 선생님이 옛날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들의 구두 속에 피가 차올랐다 쉿! 누가 비린내를 풍기는 거야? 소녀들 중 누군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졸업식 날, 새장을 열고 노란 카나리아를 고양이한테 던져줬어 우리 땐 다 그랬지 소녀들은 모두 그랬지 그래야 구두를 벗을 수 있었단다 구두를 벗는 대목에서 우리는 참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물비린내를 피워 올렸다 선생님은, 한때는 소녀였던, 어쨌건 지금은 소녀가 아닌 여자는 회초리로 허공을 난도질했다 소녀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은쟁반! 위로 떨어지는 좁쌀 같은 졸음을 쪼아 먹었다 옛날이야기는 늘 그렇게 끝났다 우리가 소녀였을 땐 그랬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소녀였던가?

 

-계간 『세계의 문학』 2008년 겨울호 발표

 

 


 

 

윤예영 시인 / 금수회의록

​​

​ 사람이,

 사람 가운데 가장 약하고

 그래서 어여쁘고

 그래서 버려진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을 낳았다.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을 낳는 일은

 고금에 흔한 일이니

 그리 놀랄 것은 못된다.

 

 사람이 낳은 사람이 아닌 것은 사람의 터 중 가장 더러운 곳에 버려졌는데 다시 사람의 터와 은밀한 숲 사이로 옮겨졌다가 다시 울창한 중심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무도 사람이 낳은 사람이 아닌 것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것만이 아니라 길짐승도 산짐승도 들짐승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래로 사람이 버린 사람이 아닌 것을 길짐승이 보호하고 산짐승이 먹여 주고 들짐승이 덥혀 주는 일은 흔한 일이었으나 지금은 짐승이란 짐승은 모두 사람과 차별이 없는 시대인지라 바야흐로 짐승들도 사이를 가로질러 온 것에 대해서는 냉담하기 그지없고 해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이것이 사람이 낳은 사람이 아닌 것을 희생에 쓰기 시작한 유래이다. 일찍이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았던 이것은

 

 크고 단단하다.

 회백질이다.

 둥글다.

 팔다리가 없고

 머리와 꼬리가 없다.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메탄과 질소로 만들어졌다.

 고백을 적시는 뜨거운 거짓말

 자궁을 긁는 손톱

 안락한 비정형으로 만들어졌다.

 작별을 고할 때 이것은

 땅을 마주한 자세로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액과 즙을 쏟아냈고

 그것이 모여 대지에 아름다운 수를 놓았다.

 이 마지막 날숨은

 언젠가는 그 위로 무수한 덤불이 자라나 사라질 터인지라

 이를 두려워한 짐승들이 모두 모여 저마다

 보고 듣고 맛보고 쓸어 본 후

 기록으로 남긴다

 

누가 나를 기억할 것인가

나는 기록됨으로서 기억되지 않는 자

죽음으로 삶에 내던져진 자

되풀이되기 전에 기록된 유희

누가 나를 절멸할 것인가

계간 『세계의 문학』 2014년가을호 발표

 

 


 

 

윤예영 시인 / 책 읽는 남자

 

 

책 읽는 남자를 사랑했다. 공원 벤치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책을 읽는 남자,

책을 읽다 가끔씩 책 속에 숨어버리던 남자, 책 속에 들어가 오렌지 껍질을 벗기며

다시 책을 읽는 남자, 가끔씩 나를 읽던 남자, 내 입술에 담뱃재를 떨어뜨리던 남자,

내 가슴에 밑줄을 긋던 남자, 내 안에 책갈피를 끼워 두던 남자, 가끔씩 나를 접어버리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먼지 쌓인 책꽂이 한 켠에 꽂힌 남자, 헌책방에 치워버릴 수도 없는 남자.

 

 


 

 

윤예영 시인 / '정'은 음지에서 왔다

 

 

다섯 살,

어느 방 할 것 없이 어둠이었다

일곱 살,

집의 반쪽은 양지, 반쪽은 음지였다

아파트는 그랬다

크고 넓은 안방은 세대주 '갑'과 배우자 '을'의 차지였고

볕이 잘 드는 마루는 쓸모가 없었다

부엌과 작은 방은 음지였다

물론 '정'은 음지였다

여덟 살, 아홉 살, 열 살,

내내 음지였다

열한 살, 열두 살, 열세 살,

역시 음지였다

음지에서 자란 곰팡이가 가끔 포자를 터뜨렸다

음습한 구애

열네 살,

'정'의 방에서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었다

동향집의 비극

열다섯 살, 열여섯 살, 열일곱 살

노을 속에서 가끔 소쩍새가 울었다

열여덟 살,

가끔 노을에 밧줄을 걸고 줄타기를 했다

그러다가 그 줄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했다

목을 매달지는 않았다

열아홉 살,

난생처음 하루 종일 빛이 드는 방에 살았다

노란 물탱크를 머리에 인 옥탑방

노을 대신 스모그 속을 헤맸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찜통터위에 해가 뜨면 기어나와야 했다

양지의 설움

스물세 살

'갑'의 퇴직금으로 또 다른 '갑'에게 보증금 3천에 월 30짜리 양지를 구했다

보증금을 낸 '정'은 공평하게 가장 크고 밝은 방을 차지했다

두 명의 음지가 '정'에게 기생했다

스물네 살,

눈을 뜨면 해가 졌다

양지의 뿌듯함은 '정'의 것이 아니었다

스물다섯 살

임대인 '갑'은 임차인 '정'에게 불법 기생하는 두 명의 어둠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빛이 생기라 하니 빛이 생기고

나가라 하니 나갔다

스물일곱 살,

오전 내내, 손바닥만큼 비치는 해를 따라 몸을 돌렸다

주몽을 잉태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대신 평생 양지에서 자라서 양기충천한 '갑'이 나타났다

스물여덟 살,

'정'은 세대주 '갑'의 배우자가 되었다

'정', '을'로 승격

스물아홉 살,

집을 나서면 해가 뜨고, 집에 들어오면 달이 떴다

빈집에서도 양지는 혼자 따뜻했다

서른 살,

'갑'과 '을'의 직계비속이 태어났다

그를 '정'이라 이름 붙였다

'정'은 음지에서 왔다

 

-시집 <해바라기 연대기>에서

 

 


 

윤예영 시인

1977년 서울에서 출생. 서강대 국문과 대학원. 1998년 《현대문학》에 〈동그라미 변주곡〉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해바라기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