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신숙 시인 / 새끼회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6. 08:00
김신숙 시인 / 새끼회

김신숙 시인 / 새끼회

 

 

 정육점만 찾아다닌 적 있다 나는 젊었고 아버지는 일찍 죽었다 돼지 태반을 발견하면 멈춰 바라보았다 심장이 두 개 있어요 암퇘지의 눈빛을 읽은 도살장 직원은 없었다 산달이 다 된 새끼는 뼈가 생겨 태반 속 새끼가 어릴수록 더 빨리 팔려갔다

 

 첫사랑은 그 무렵을 닮은 음식처럼 냉정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를 죽여버리겠어 사실은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 생각했다 가장 끔찍한 것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썹칼로 반달만 한 상처를 만들어 가장 연약한 친구들을 골라 습작시처럼 보여주었다 나는 젊었고 스무 살이었다.

 

 길을 걷다 아버지 등 닮은 사람을 만나면 한참을 따라 걸었다 그런 날 밤은 등뼈처럼 깊고 어둡다 나는 말없이 둥근 달을 바라보았다 태반을 갈아 쪽파와 식초로 양념을 하고 한 그릇 걸쭉하게 해장하시던 아버지 그의 골격은 내 생의 뼈가 다 굳기 전에 무너져 버렸다

 

 땅으로 떨어져 중력을 맛본 둥근 달을 찾아다닌 적 있다 정육점 스테인리스 쟁반 위 암퇘지의 자궁은 심장이 두 개인 채 도살되었다 첫사랑도 심장이 두 개인 채 도살되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낳지 않았지만 당신이 낳은 나를, 내가 살아왔다.

 

 오랫동안 뼈가 갈리지 않았다.

 

 


 

 

<동시>

김신숙 시인 / 모래귀

 

모래에도 귀가 있어요

소리를 다 들어요

누군가 밟으면

꽉 눌리면서

모래는 귀를 더 활짝 열어요

 

파도가 치면

바닷물에 쓸려가며

모래는 귀를 시원하게 열어요

모래에도 귀가 있어요

파도에 부딪치며 바다를 듣는 귀

 

바다가 잔잔하면 잔잔하게 듣고

바다가 우렁차면 우렁차게 듣는

 

작은 소리에는 작은 귀

큰소리에는 큰 귀

모래에도 귀가 있어요

바위도 자갈도 조개껍데기도

모래보다 더 큰 귀를 가지고 있지만

 

바닷가 막내 모래들은

너무 작은 귀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게 궁금해 귀를 활짝 열어요

 

온몸이 다 귀라서 아무 곳이나

자꾸 붙어가요

 

-시집 <열두 살 해녀> 한그루, 2020

 

 


 

 

김신숙 시인 / 해녀 걸음

 

 

반듯해야지

 

하늘하고

바다를

나눈 것처럼

 

반듯한 마음으로 걸어야 해

 

푸른 수평선을 바라봐

반듯하지

 

빗창처럼

반듯하게 몸을 세워야 해

 

정신을 차렷 해야 해

 

금방 본 바닷속 물건을

한번에 딱 떼내야 해

 

똑바로 걸어야 해

반듯하게 걸어야 해

 

매일 말씀하시는 우리 엄마

너무 오래 물질하면

 

비틀비틀 걸어오던 해녀 엄마

 

-시집 <열두 살 해녀> 한그루, 2020

 

 


 

 

김신숙 시인 / 시집

 

 

 사람이 번데기 모양으로 굳어 있는 곳, 집이었다

 시집의 등은 가늘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참자 입술을 다물고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하품을 하듯 슬픔의 등을 오므리고 하품을 하는 척

 눈물을 흘렸다 울다가 또 울어버리는 날들, 그날들이 비행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고 나는 내가 태어난 알의 껍질을 자꾸만 씹어 먹으며 자랐다

 

 자아란 이렇게 비극이구나 코끼리 귀만큼이나 넓은 호수를

 이불깃처럼 펼치고 사막을 날게 될 줄은 모르고, 사람이 번데기 모양으로만 굳어 있는 곳, 집이었다 침을 뱉으면 바늘을 찾아 하얀 공책에 수놓았다 네가 뱉은 침 위에서 잠을 자며 나는 더 탄탄히 굳어갔다 그의 등은 가늘었지만 시집은 시를 읽어 주었다

 

 이곳은 사막이야 눈을 떠봐, 너는 사막을 나는 코끼리귀호랑나비가 된 거야 사각사각 귓가에 머물러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내 날개의 소리인 줄은 모르고, 어디선가 호수가 얼어가는 소리인 줄 알았다

 

 눈물의 각질들이 사막 어느 곳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때

 눈물은 더 어두운 물 아래로 끌려가는 비행인 줄 모르고, 비행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건 까마득히 모르고, 전등을 꿰맬 자리에 어둠을 달고 살았던, 집이었다 시집을 읽었다 반듯한 시의 가르마를 타듯 나는 눈물로 떨어지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날았다 비행을 읽었다. 집이었다

 

 


 

 

김신숙 시인 / 달의 벽화

 

 

 저 높은 계단 끝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달의 정면만을 그리지요 벽화마을 앞마당 사람들은 밀물 썰물로 달을 따라 기울지요 운석 여러 개 떨어진 시커먼 살림들 저 높은 곳에 달의 뒷마당이라고는 가본적 없는 아이들이 살지요

 

 달의 뒷마당은 하얀 도화지일까 아니면 콘크리트 벽일까 달의 뒷마당을 가본 적 없는 아이들은 상상하지요 달빛이 먼저 와 부딪치는 골목길에서는 저 계단 끝에서 끝으로 걸어가는 운석을 닮은 엄마의 푹 꺼진 뒤통수가 있지요

 

 오늘도 엄마 토끼는 보름달이 차도록 시커멓게 절구질합니다 달빛을 으깨 씹어야 한낮을 견딜 수 있으니까요 희뿌연 라면 면발처럼 퉁퉁 불어가는 가로등은 우리 엄마 종아리랑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구불한 골목길 계단에 앉아 엄마 얼굴 그러지요 사람들은 우리 마을을 달동네라 부르다 벽화마을이라 부르지요 골목길 도화지에 가물은 꽃 하나 원색으로 웃다가 우리들 얼굴에 마른버짐 피오날 때 페인트칠이 함께 벗겨질 뿐인 이 달동네를

 

 벽이라 부르고 꽃이라 부르지요

 

 저 낮은 계단 끝 마을에 사는 아이들도 달동네의 정면만을 보고 살지요 우리도 달의 정면만을 보며 살지요

 

 


 

 

김신숙 시인 / 여름풀

 

 

 방학이 시작되면 알코올을 샀다 방충망에 매달린 곤충을 잡아 궁둥이 쪽으로 주삿바늘을 질렀다 보통의 박물은 이름을 달고 있어야 하지만 나는 곤충 이름을 찾아본 적 없다. 아들이 일찍 죽은 외할머니 집 여름풀은 무성하고 이름이 없었다 선생님도 박제만 있는 과제를 대충 훑어보았다

 

 상처가 난 곳은 더 긁었다 그리고 다시 긁으면 피가 났다 짓무른 곳들은 어떤 곤충이 문 흔적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사내가 외할머니 방을 건너 나를 건너 언니를 밟고 지나 갈 때 외할머니는 귀가 멀었다

 

 키가 멈추고 생리가 시작될 때까지 여름방학 동안 곤충을 죽였다 언니의 성기를 찬물로 씻어주며 우리는 여름풀처럼 자랐다 사내가 사라지고 언니는 박제가 되었다 언니의 긴 머리카락에서 주삿바늘 냄새가 났다

 

 채집과 비슷한 것을 찾으며 성장했다 입에서 방치된 과제물 썩어가는 맛이 났다 특히 시의 전등은 주삿바늘처럼 명확했다 계절이 낮아지면 눈이 천 개 달린 시인은 낮게 날았다 시인이 되려면 곤충의 눈을 자세히 본 적 있어야 하지요 잠자리 시인은 천 개의 눈알로 말했다

 

 어떤 여름 방학엔 맨발로 생뱀을 밟았다 그 뱀도 어려서 비명을 지르며 서까래를 올랐다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생뱀이 얽히고 간 어린 발등 위로 오랜 시간 풀벌레가 울었다

 

 외할머니가 갯메꽃 핀 마당 샅샅이 백반을 뿌렸다 언니는 할머니 머리카락보다 더 빨리 하얗게 변했다 죽은 외할머니 집 마당을 지나 방문을 열 때마다 언니는 하얗게 부서졌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김신숙 시인 / 너를 만난 적 없지만 너의 목소리가 궁금해

 

 

 풍차가 태어나는 경계가 있다 목소리 없는 생을 글씨체로 받아 적는 대륙에서 세계의 풍차들은 날아오른다 풍차를 기록하며, 풍차가 사라지는 것은 흰 천이 이마까지 닿는 경계에서 귀만 남아 여덟 시간을 더 듣는 일과 비슷하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전설을 필사한다 얼굴과 얼굴이 닿는 시절

 

 투명한 바람이 불었고, 닻을 밀었다 귓바퀴 붉어 다른 톱니로 계절이 옮겨 가는 동안 시침과 분침은 맞물려 갔다 이곳은 저곳에 닿았다 낮은 계절에 출발한 엔진이 다음과 다음의 세계로 바람이 불었다 달팽이관 끝에서도 버스는 서지 않지만 우리는 오지로만 기어를 꺾었다

 

 바람이 불었고 목소리 한 바퀴 돌았다 풍차는 귀가 누락하는 형식으로, 음축된 무늬로 가장 힘들게 성기를 빠져나온 모습으로 날아올랐다 이마가 뜨거운 사람이 잊지 않은가 백 년 전에도, 일본의 뒷골목에서 땅콩과 치약을 팔았다는 여류시인도, 그렇게 풍차가 자꾸 태어나는 건, 바람이 귓속으로 숨는 까닭

 

 우리는 누락되는 세계를 흠모하니까, 지워지는 글씨체로 우리는 접촉면이 닿는다 풍차는 날아오르고, 목소리 통할 리 없는 세계의 길은 비루하다 축축한 고등어 등처럼, 침 바른 연필심처럼, 여류시인 같은, 풍차의 경계가 있다 풍차의 귀 빠지는 소리를 듣는, 풍차가 태어나는 경계가 있다

 

 


 

김신숙 시인

1979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 2012년 《제주작가》, 2015년《발견》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동시집 <열두 살 해녀>. 서귀포에서 독립서점을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