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와연 시인 / 죽은 나무의 기억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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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와연 시인 / 죽은 나무의 기억
오래전 숲을 떠나온 나무 방안엔 한랭과 다정이 수시로 바뀌는 숲이 있고 한 이불 속에서도 돌아눕는 계절이 있고 소곤거림과 침묵의 공기에는 엉켰다 풀리는 기후가 있다 봄이 오면 죽은 나무에도 물 흐르는 소리 들린다 가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낮게 걸린 구름자락을 끌어와 휘감고 내 머리맡에 새소리를 흘리기도 했다
어릴 적 원피스 한 벌 걸어놓고 오래 흔들리던 옷걸이를 본적도 있다
죽은 나무는 알고 있을까 겨울이면 왜 잎이 무성해지는지 찬바람이 일면 왜 옷걸이에 외투와 목도리를 치렁치렁 걸어두는지 그 기억으로 겹겹이 나를 껴입고 밤늦게 돌아온 남편의 외투까지 받아 걸치다 설해 목처럼 가지 하나가부러졌다 그래도 바깥일이 궁금한 듯 주머니를 뒤지며 킁킁거렸다 몇 차례 술집을 옮겨 다닌 행적을 걸치던 나무 언제부턴가 무릎 나온 피톤치드만 걸치고 있다
뿌리 한 뼘 내리지 못하고 외발로 서있는 나무 여름엔 여름단추가 겨울에는 겨울단추가 걸려있다 말라붙은 새소리와 바람소리도 없는 나무로 서있다
-2013. 「젊은시」
정와연 시인 / 낙과
낙과를 파는 코너에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 낙과를 사기 위한 줄이라니 마치 과일나무 밑을 두리번거리듯 수풀을 헤치듯 서 있는 사람들 옛말에 낙식은 공식이라 했는데 어떤 마음이 저리 길어 파치 앞에 기다리고 있나 모두 한 번쯤 낙과였던 기억이 있다는 듯 체온이 묻은 낙과를 손으로 받아보았다는 듯 줄을 서 있는 태풍의 끝, 쓱쓱 닦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한 사람이 한 봉지씩 들고 얼굴이 환하다 낙과는 색이 변한 부위가 가장 물렁하다 물렁한 부분은 빠른 속도로 변한다 모두 자신의 물렁한 부분을 알고 있다는 듯 한 번 더 물렁한 부분을 만져보겠다는 듯 즐거운 배급, 한 사람이 열 개라면 열사람이면 백 개 위로받는 사람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그 배수(倍數)다 붉어지다만 낙과들이 그 어느 것보다 오늘은 상품(上品)이다 한낮의 위로의 줄이 길다 태풍의 긴 머리채가 휘감았던 나무 밑 굴러 떨어져 멍이 든 것들 아삭아삭 풋것 베어 무는 소리를 생각하면 그 맛, 위로의 맛이리라는 것도 짐작하겠다
-시집, 네팔상회, 천년의시작
정와연 시인 / 한 되들이 술주전자
몇십 년을 퍼마시면 저렇게 입이 헐까 손잡이는 겨우 찌그러진 몸 통에 걸려 있다 필시 술자리에서 여러 번 소매 잡혀 끌려간 흔적이다 잔으로 먹고 말로 푸는 허세 아닌 허세가 누렇게 변해 있다. 술주전자가 끓어 넘친 적은 없지만 술은 수시로 끓어 넘친다 그 끓어 넘치는 술주전자 속은 다 우그러져 있다 밖에서 들어간 흠은 안쪽에 두드러지지만 안에서 우그러진 부분은 밖으로 나온 흔적이 없다 술을 부을 때마다 화끈거렸을 속,
나는 한 되짜리 막걸리 주전자를 들었던 시간으로 컸고 아버지 그 주전자 기다리는 시간으로 늙었다 아버지 술심부름 시켜놓고 수십 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듯 문 밖을 들락날락했다 막걸리 한 되로 찰랑거리는 주전자 그 주량으로 세상 다 흘렸다
부글거리는 술, 주전자 안에서는 한 번도 발효된 적 없다 깊은 잠 잔 적도 없다 그 주전자 오래 되다 보면 술 없이도 안에서 부글거리며 발효되는 것들이 있다 집안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버지처럼 노란 주전자는 없다
정와연 시인 / 몰두
첫서리가 내린 화단 뒤늦은 꽃들이 묵도에 들어갔다 저의 목을 꺾고 머리를 버리려는 몰두 중이다
생각을 온통 머릿속에 넣고 몰두하다 보면 발걸음은 허방을 딛기 일쑤지만 저의 목을 꺾고 머리를 버리는 일이 고심 끝에 내린 묘수라면 식물의 결정은 내년을 바라보는 일로 추운 잠의 지혜를 견디는 것이다
겨울을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봄, 새싹 하나가 파릇하게 돋는 것이다 몰두란 묵은 고민의 목을 푹 꺾고 엉킨 머리를 버리는 것이다
다시 봄은 몰두의 계절 가느다란 가지에 꽃 피운다는 것은 몰두 위에 몰두를 얹히는 일이다 흔들리는 무게를 감당하는 것과 그 무게를 버리려는 꽃의 환승 법을 실천 중인 것이다
정와연 시인 / 망치의 생각
망치로 두드려서 지은 집을 다시 망치로 허문다 망치는 진화가 느린 도구다 삼십년도 더 된 집,그 집을 지을 때의 망치가 다시 그 집을 깨부순다 망치의 완벽한 쓰임 앞에 집들은 건축되고 다시 부서진다 생산과 파쇄를 동시에 갖고 있는 망치 속에는 붉고 푸른 별들이 가득하다 어떤 형태들도 망치 앞에서는 땅땅 소리를 감추려하거나 청하려한다 허물다만 집 마당에 놓인 망치에서 별들이 차갑게 식어있다 덧대어진 것들이란 모두 망치의 신세를 진 존재들 꽃잎이거나 풀잎 같은 연한 것들은 망치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수안의 머리를 가졌거나 뾰족한 속내를 갖고 있는 것들은 천적처럼 망치를 두려워한다 망치는 우측의 한 성단星團이다 못을 삐끗 비껴갈 때 더 많은 별들이 태어나는 망치에 대해 천문학자들은 모르는 것 같아 다행이다 머릿속의 별들을 다 쏟아 연천교連天橋를 놓으려는지 각을 맞춰 땅땅 두드리는 망치소리 하늘도 두드려야 별이 뜨는 밤 허물어진 옛집의 처지를 망치에게 묻고 싶다
-시집 『네팔상회』 2018. 천년의시작
정와연 시인 / 파열
부서지는 것들은 아주 먼 거리를 지나온 것들이다
접시 하나가 깨어지는 순간은 수많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지나왔다 날카로운 모서리나 딱딱한 바닥을 피해 먼 시간을 지나온 것이다
한 밤에 듣는 빗소리, 바닥에 닿아야 부서진다 아무도 도달해보지 못한 그 높이에서 출발한 톡톡 튀는 빗방울소리 빗소리는 편도가 아닌 왕복하는 소리들이다 한없이 부드러운 파편
가끔 잠에서 깰 때 밤과 밤을 왕복하는 중이라는 것 울음도 웃음소리도 먼 감정을 달려와 유쾌하게 또는 슬프게 깨진다
뿌연 거울 속에서 나를 닦아야 하듯 어둠을 쪼개는 빗줄기는 밝고 건조한 기후의 파편일까 목소리에도 부스럼이 난다
거칠고 텁텁한 입맛 기침 한 번에 떨어질 딱지가 아니다 부스럼에도 윤기 도는 그 시절 지나면 파편이 튄다 파편은 평평한 길을 지나온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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