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윤 시인 / 며느리 야채가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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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윤 시인 / 며느리 야채가게
오가며 눈인사가 오십 년 장사 밑천 붉은 볼 곱던 새색시 어느덧 칠순이다 사람은 한물갔지만 상호는 제철 푸성귀
좌판부터 단골에겐 본전도 남는장사 억척도 생물이라 뒤적이면 무르는지 버젓한가게 얻고도 무르팍이 시리다
며느리 없는 며느리 가게냐는 우스개에 미나리 줄기처럼 매끈하던 허리춤이 뱃살만 늘었겠냐고 넉살 좋게 눙친다
큰아들 장가가고 진짜가 나타났다 몸빼바지 며느리 싱싱해요 호객하고 떨이요! 고희 며느리 추임새 절창이다
오서윤 시인 / 가방
끼워 넣을 내가 많아 어제보다 무거워요
하루가 흔들리며 어깨를 짓누르는데
거품만 빼면 될까요 나, 라는 무게에서
한쪽으로 쏠리는 기울기를 읽지 못해
때로 실밥 터지고 걸음 뒤뚱거려도
넣지도 빼지도 못해요 나, 라는 이력서
비구름 몰려있는 귀퉁이 우산 한 개
바닥을 탈탈 털어 잿빛 날들 고백할까요
마음껏 펼치고 싶어요 나, 라는 햇살 목록
오서윤 시인 / 동호댁 할머니 손가락에 구구단이 산다
동호댁 할머니 손가락엔 수상한 장부가 산다 계산법을 알 수 없는 덧셈과 뺄셈이 숨어 있다 수리(修理)에는 없지만 가끔 세상에서 발견되는 셈법 옆집 상처(喪妻)와 몹쓸 사람에겐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숫자를 솎아 내는 속 깊은 구구단이다
할머니의 손가락엔 천기를 읽는 두꺼운 달력이 산다 팥꽃이 피는 시기와 산을 넘어오는 장마 콩이 여물어 갈 때마다 할머니는 더 바쁘다 복잡한 족보와 길흉의 절기와 식구들의 생일과 오래전에 죽은 나이도 다 기억한다
갑골문자처럼 단단한 할머니의 손등 주판알 튕기듯 못생긴 손가락 하나하나 세어 왕복할수록 할머니의 곳간이 풍성하다 이른 봄 멀리서 오는 소식을 감지하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릴 때도 있지만 어느새 넓적한 손등이 어지러운 마음을 덮어 버린다
학교 문 앞에도 못 가 본 주먹구구식이지만 할머니의 몸엔 여러 곳의 교문이 있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이름 없는 할머니의 졸업장
동호댁 할머니 돌아가시고 그 집 식구들 모두 까막눈이 되었다
오서윤 시인 / 간절한 틈
기도실 밖에 황철나무 한 그루 서있다 황철나무는 몸이 틈이다 들어왔던 봄이 가을로 나와 주변의 배경이 되어 겨울로 선다 콘크리트 바닥에 나무 한 그루를 키웠던 햇살이 건조한 벽 사이로 한 계절을 다시 들여보내고 있다 경계점이 된 나무 한 그루는 저 틈과 같은 어두운 색을 지녔을 것이다 비좁은 틈으로 쏟아내는 호흡이 뜨겁다 완강한 몸을 쪼개고 뼈를 부수고 틈 사이로 햇살을 밀어 넣은 뚝심 어둠 속에서 살짝 하얀 치아가 드러난다 빗살무늬의 날카로운 균열을 수습하는 것은 어둠을 잡아 앉힌 의자들이다
낯선 타인의 혓바닥 같기도 손가락 같기도 한 일별의 빛, 어두운 기도실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기도의 끝 문장처럼 길게 들어온 빛이 다시 황철나무에게 돌아가고 있다 저처럼 간절한 빛을 본 적 없다
오서윤 시인 / 우리 남편은 스파이더맨
세상엔 드러나지 않는 정체들이 많다 남편의 옷을 빨다 보면 지워지지 않는 점액질이 있다 남편이 묻혀 온 상사의 눈치와 몇 만 볼트의 위험을 조심스럽게 문지르자 알 수 없는 올올의 행적이 촘촘하다
절연된 시간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간다 전선을 타고 다니는 스파이더맨 어깨엔 때론 한마을의 칠흑 같은 어둠과 두꺼비집이 걸려 있다
스파이더맨의 손목에서 나온 거미줄이 허공에 어지럽다 빌딩과 빌딩 사이 골목과 골목 사방으로 뿜어 댔을 허공을 가르는 촉수 살아 있는 불꽃을 분해하고 조립한다 그의 활선 작업은 멈추는 법이 없다 고압의 생들은 저 혼자서 달아오르지 않는다 미처 완수하지 못한 정의는 엉키고 선과 선의 접지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흐르고 있다 평생 온몸을 감도는 부귀영화의 전율도 느껴 보지 못한 스파이더맨 몇 번의 감전이 십팔 평 내부를 빠져나갔다
악당은 늘 높은 곳에 있다 매설의 볼트를 타고 다니거나 과부하를 일으킨다 손끝을 조심하라, 피복의 안과 밖에 순간에 천 리를 가는 속도가 있다
암흑을 향해 날아가는 우리 남편이 스파이더맨인 것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모른다
오서윤 시인 / 나스카라인
최초의 도형은 삼각형 아니었을까 늦가을이 제도기를 들고 먼 거리를 가로지르는 금을 긋고 나면 세 개의 모서리를 날고 있는 새들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로 서로 꼭짓점을 틀어쥐고 있는 것 같지만 흩어지려는 다른 방향을 꽉 틀어쥐고 날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먼 거리를 날아 한 곳에서 합쳐지는 세 개의 계절들
서로 조금만 몸을 틀면 전혀 다른 방향이 되는 삼각편대 흰 깃털의 편대가 굉음도 없이 날아간다 촘촘하게 죄어오는 기류와 간격이 하늘의 도형을 만든다 삼각은 군집의 대열 중에서 가장 길고 오래 날 수 있는 호흡법이다 꼭짓점을 물고 있는 입들은 불안을 가장 잘 읽는 도형일지 모른다
날아가는 새들은 큰 지형을 외우거나 기억하고 있다 삼각이 내려앉아 그리는 둥근 군무 오래전에 떨어진 새 한 마리 추위와 먼 비행의 거리가 새겨진 기슭의 화석으로 남아있다
뼈도 발자국이다 수천 년의 비행이 착륙한 나스카라인 새들이 물고 온 하늘의 발자국들이 빽빽하다
오서윤 시인 / 곰곰한 호박
턱을 괴면 손바닥엔 호박처럼 받쳐줘야 할 씨앗들이 촘촘히 들어찬다 턱을 괴고 있는 동안 펄럭이는 생각을 붙잡는 것은 바지랑대 같은 팔이다 턱의 말이 고여 있는 손바닥을 펴면 잠시 갸우뚱거린 생각이 비틀어 쥐었던 말을 쉬겠다는 듯 움푹 팬 자국이 있다 몇 번쯤 궁리의 씨앗이 여물어간다 턱짓으로 불러 모은 생각 대부분은 입 안쪽에 감춰 둔 뾰족한 말들 찌그러진 턱이 동그랗게 되는 동안 초승달처럼 눈이 찢어지며 딱딱한 고집에 여러 개의 핏빛 대답이 생긴다 간혹 지루해 깜빡 졸면 까만 잠을 달고 멀리 달아나버리기도 한다 왼쪽에 두고 왔던 생각이 오른쪽으로 쏟아질 때 줄기처럼 뻗어 나가던 모색의 꼬리를 잡아당기는 것은 쿵, 저 산으로 떨어지는 붉은 저녁 팔이 중심축을 곧추세우며 뒷전에 밀려나 있던 명백한 일들을 불러 모은다 턱을 괴고 있는 동안 손바닥엔 엉킨 줄기의 호박이 잘 여문다 잘 쪼개진 호박 속엔 한쪽으로 쏠린 눈들이 물렁물렁한 생각 속에 가지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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