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석구 시인 / 산위에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6. 08:00
이석구 시인 / 산위에서

이석구 시인 / 산위에서

 

 

내 밟힌 그림자도 살이 찌는 이 가을에

기러기 눈물 같은 낮달 하나 떠오르면

골짜기 깊은 안개가

능선 위로 넘어가고

 

열매를 뜸 들이며 허물 깁는 하늘빛이

무지개 얹어두고 넘쳐오를 것이지만

메아리 경계로 두른

연봉들이 부침하다

 

마음만 헤아리면 궁색한 가난인데

바람이 먼저 물든 단풍으로 불을 댕겨

신혼의 아내는 지금

꽃씨 봉지 접는다

 

-시조집 『마량리 동백』 (고요아침) 중에서

 

 


 

 

이석구 시인 / 꽃을 먹으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내가 내 손 잡고

진달래꽃 한 점 두 점

화전花煎을 지지다가

술잔을

기울여 가며

돗자리에

앉았다

 

치마를 살짝 들어

햇살을 잡아당기자

뚜껑 열린 술 향기에

아내는 취해서 운다

꽃 진 뒤

기다려야 할

내년 봄이

멀었다고

 

 


 

 

이석구 시인 / 상감(象嵌)유리목걸이* 속의 여자

 

 

시간이 지날수록 기우는 달그림자

애타는 속마음을 말하지 못한 건가

머나 먼 초원길 따라 신발 끈을 고쳐 매며

유리띠 곱게 둘러친 새파란 물병 쥔 채

모래와 바람 실은 단봉낙타 등을 타고

오래 전 돈황을 거쳐 서역에서 온 여자

 

늦은 밤 거울 속을 바라보며 미소 지은 건

분꽃 가루 걸러내 화장을 고치는 건

울타리 문 밖에 서서 처용을 기다리는 거

 

낭산을 지나가다 도리천에 혼자 올라

빨강 노랑 하얀 꽃이

가득 핀 숲에 들다

골짜기

물살에 밀려 행방불명이 된 건

 

지상에서 인연은 흐르는 꿈이었다며

훗날, 유리를 감싼

금박 씌운 구슬인양

대나무

피리 구멍 찍힌 입술연지만 붉고

 

코발트 유리컵을 남겨놓고 떠난 그녀

검고 긴 속눈썹에 은쟁반 비춘 달빛

한 가닥 비단 실 뽑아 나비되어 날았다

 

*경주시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목걸이

 

 


 

 

이석구 시인 / 납매蠟梅

 

 

발자국 꾹꾹 찍힌 얼음장 풀린 뒤

 

당신과 내 그림자는 물에 뜬 꽃잎 한 점

 

속눈썹 파르르 떨며

어디에서 꽃피우나

 

바람 구멍 숭숭 뚫린 끝물의 붉은 매화

 

큰 돌 작은 돌이 에워싼 강물 소리

 

꽃망울 가운데 놓고

누가 먼저 향을 받나

 

 


 

 

이석구 시인 / 그늘이 초록을 만졌다

 

 

소나기 한 줄기가

쏟아진 다음에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물 위에 입혀진 무늬

당신의 긴 그림자

 

바람이 분다 불어도 그 끝을 잡지 못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흐르는 뭉게구름

배추밭 고라니 발자국 왔다 갔다 서성이고

 

잘못 드는 길이면 그대로 주저앉을

팔월 여름의 반은 물결에 떠올라서

수북이 쌓인 풀잎이

꽃피는 줄 몰랐다

 

 


 

 

이석구 시인 / 베트남 신부(新婦)

 

 

누굴까

그대에게 나보다 먼저 가서

야자수 잎사귀 아래

신발 몰래 감춰두고

빈자리 하나 만들어 기다린 이 누굴까

벽속에 귀를 대고 문 밖을 단속하다

스프링이 풀리며

조금씩 흔들리는 몸

오늘 밤

긴 잠에 빠진 허황후가 되고 싶은

나 그대 마음같이 닮은꼴로 변하여

춤추지 않아도

참 푸른 하늘인데

말갛게

꽃대를 올린 호접란이 눈부시다

 

 


 

 

이석구 시인 / 제45번 푸조나무

 

 

담양천 한가운데

가장 빠른 물속으로

징검다리 물결 따라 돌아 나온 그림자

박씨네 태국 며느리가

딸애 손잡고 건넌다

 

메콩강 야자나무 잎사귀 무성한 길

 

우기雨期의 바람처럼 새떼들 날아올 무렵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구름이라 생각하다

 

관방제림에 뿌리를 둔

45번 푸조나무

주름 깊은 물살이

고였던 습지에서

엄마 손

놓친 딸 아이

울고 있다

엉엉 운다

 

 


 

이석구 시인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및 同 교육대학원 졸업. 2004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커다란 잎』. 현재 '21세기 시조'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