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운 시인 / 쓸쓸한 저녁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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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운 시인 / 쓸쓸한 저녁
어린 내가 실타래 속에 양손을 집어넣어 팽팽하게 당기고 있으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부지런히 실패에 실을 돌려 감는 엄마 읍내 술도가 술독이 비었는지 은 웬일로 맨정신으로 돌아오신 아버지 일찍 자리에 드시고 초저녁 싸움까지 잘 마무리하고는 동생들도 잠이 들고 언니는 자기 방에서 수예 숙제하느라 조용하고
모처럼 건 안부 전화 속 통화음들은 황사를 건너는 바람처럼 희미하고 찢어져 너덜대는 벽보처럼 한때의 효도 공약은 공허하네
노모의 기침소리만 깊어가는 저녁 앞마당 산수유은 피었거나 말거나
정영운 시인 / 물의 평화
나의 근본은 뿌리를 내리지 말라는 것 근根없이 본本을 지키라는 것 톡톡 쏘아대는 햇빛과 허리 실실 꼬아대는 바람에게도 은근한 눈빛 이상은 보내지 말 것 넘치는 것들 내버려두고 분수를 지키라는 것 혹하다가 뿌리내리고 가지 뻗기 시작하면 정말 큰일 그렇게 되면 나, 물 아니지 비 그친 어둑신한 계곡을 허둥거리며 내려오던 시간은 두려웠고 메꽃 서너 송이 몸 감고 있던 녹슨 철교 밑을 돌아 나오던 시절은 적막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아직 아픔은 모르지 하긴 부러질 가지도 없으니까 곪아터질 뿌리도 없으니까 그러나 내게도 한번은 있겠지? 걷잡을 수 없이 온통 솟구치는 일 그치? 그때 누가 감히 허방 친다 말릴 것이며
정영운 시인 / 상처에 대한 예의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였다고는 하지만 까마득히 멀어진 그대 앞에 도달할 수는 없지요 지는 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산책을 끝낸 듯 돌아오는 것뿐입니다
상처는 깊고 단단하여 아무도 눈치챌 수 없습니다
내성도 생기지 않을 이런 류類의 상처는 빨리 꿰매고 봉합하는 게 상책이겠지만 어떻게 그러겠어요? 아슬아슬하게 이어 왔던 그와의 줄다리기에서 나는 완패했고, 피 흘리면서 얻은 전리품은 이것뿐인데요
이 단단한 상처 길이길이 모셔두고 눈물 빼먹을 겁니다 흔하디흔하다고 식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게 실패한 전쟁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정영운 시인 / 아버지
아버지 허리병 도져 입원하던 날 하늘 끝 한번 바라봤지요 하늘 끝 세상 끝, 말이 그렇지 아무리 그런 게 끝이 있겠나 싶더라고요 내 옹색한 몸에 갇힌 쓸쓸함도 끝이 분명치 않는데 하물며
가로수 은행잎들 때 놓쳐 못 떨어진 은행 몇 알씩을 품고 내친김에 겨울 끝가지 버텨보겠다지만 계절이란 것이 원체가 빗금 치고 바뀌는 게 아니어서요 그래도 숨통은 트여야 하는 거니까 고통만큼은 분명 끝이 있을 거라며 휘적휘적 돌아서는데 움추린 어깨 뒤를 자꾸 파고들대요 건초 같은 아버지 허리뼈 주저않는 소리가
정영운 시인 / 두 마리 개가 있는 풍경
하늘 밑 세상은 늘 근사하기도 하지 오늘 또한 지독히도 오늘다웠기 때문에 완벽했지 쓸쓸함의 장치로 두 마리 개를 풀어 놓은 건 정말 잘한 일이야
갠지스의 소년 뱃사공 산딥은 동료 뱃사공 어른들한테서 손님들 호객 문제로 혼쭐이 나고 침울해진 산딥은 시멘트 벤치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만 잠이 들고 잠자느라 하루를 공쳤다고 산딥은 아버지한테서 된통 얻어맞고 얻어맞은 산딥은 사람들 없는 저쪽 강가 모래밭에 퍼질러 앉아서 목 놓아 울고 있었는데 거기에, 위로하려는 듯 슬픔을 배가시키려는 듯 하루 종일 바라나시를 헤매고 다녔을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두 마리 개를 갖다 놓으신 것도 신의 뜻이신가요? 한 마리 개는 산딥 옆에 앉아있고 또 한 마리는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정영운 시인 / 주우러 가자
주우러 가자 새벽빛 물든 덕지 마을로 사락사락 내려앉는 감꽃들 담으러 가자 양재천 영동3교 바람난 패랭이꽃들 흔들어 주러 가자 낮술로 허기 채운 망초꽃들이 훠이훠이 아무나 잡고 허리춤 추는 탄천 둔덕에 가자
몽당연필로 침 발라 익힌 교훈들이 말짱 헛것이어서만이 아니라 손가락 사이로 순식간에 빠져나간 너의 가벼움 때문만이 아니라 토막난 기억 하나 손질하기가 지겨워서만이 아니라 환전소 지나 두 번째 골목 끄트머리에 이런 벽보가 붙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이런 벽보 : 미인촌(늘씬한 미녀 24시간 대기 과부촌 바로 옆)
당신이 아직 아홉 살이면 공주군 탄천면 덕지 마을로 감꽃 주우러 가자
정영운 시인 / 외로움을 읽다
방학이 되자 아이들은 고개 넘어 동네로 흩어지고 학교 옆에는 관사로 불리던 우리 집 한 채뿐
텅 빈 교정 넓은 운동장엔 무성하게 잡풀만 자라고 혼자서 하는 공기놀이에 지친 나는 그때 어둡고 눅눅한 교실에서 만들어진 적막의 알갱이들이 깨진 창문으로 빠져나오는 걸 보았다 소리 없이 빠져나온 그것들은 전방위로 햇살이 내리꽂히는 운동장을 떠돌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이었는데
매미도 울어대고 사마귀와 여치도 동무하자 했으나 나는 그것들을 묵살했고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도 잊은 채 학교 안을 촘촘하게 채워 가는 그 입자 고운 알갱이들이 타전하는 부호들을 더듬더듬 읽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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