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란 시인 / 밤마다 나는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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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란 시인 / 밤마다 나는
위태롭지 않은 천변이나 흘러내리는 돌계단을 오르내릴 땐
꼭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면 어둠과 어울릴 수 있을까
밤마다 송충이들이 짓무른 몸으로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밤마다 임신한 고양이가 몰래 집 나가는 것을 보았다 밤마다 산당화가 꽃잎 붉게 하려고 손가락 넣어 토하는 것을 보았다
때때로 안간힘 쓰며
제 몸 지키는 일에 깃털 하나 날아가지 않았고
밤마다 나는 보이지 않거나 여기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며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처음부터 집이 없었다
박미란 시인 / 비단길
밤은 그냥 가지 않고 기억을 품고 가려 한다 무엇 때문에 어둠에서 새벽이 태어나고 무엇이 이 공간으로 밀려오는가
매일 밤이면서 새벽이고 낮이면서 저녁인 시간들 무엇 때문에 하루는 또 하루를 물고 가는가* 죽은 별이 살아나 눈썹 위에 비틀거리는가 무엇 때문에 죽은 별이 다시 죽어 입술은 루주를 덧칠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화장을 떡칠하는가
모든 밤이 서럽지 않으면서 서러운 화려하고 쓸쓸한 잔칫날인데 흰 천에 형형색색(形形色色) 실을 놓아 끝없는 밤으로 이어놓는가 새벽을 푸르게, 뼈마디 쑤시도록 푸르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밤과 새벽이 멀리 떨어진 듯 이어져 또 하루가 무단결근 없이 이리도 밝아오는가
* 파블로 네루다의 시 '어디냐고 묻는다면' 에서 변용
박미란 시인 / 우리들의 올드를 위하여
깊어지는 것과 스미는 것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맘속엔 수많은 총알의 흔적 상처가 만든 빛을 꺼내놓고 싶지 않아
그래 우리는 올드하지 왠지 그 말이 좋아, 큭큭 낡았다는 말 대신
올드를 가지고 놀면 큭큭, 정말 그런 것 같아
어쩌면 그냥 빠져들지 몰라 왔던 방향 거슬러 당신을 따라갈지 몰라
미꾸라지에게도 오늘이 있다면 앞으로 넣으면 뒤로 새는 통장처럼 털려버린 우리는 언제나 영원할 거야, 큭큭
왜 우린 서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가 잡을수록 달아나는 허공과 달의 운석에서 떨어진 당신은 얼마나 멀고 차가운가
당신이라는 말은 아무리 불러도 왜 올드 하지 않은가 철없이 좋아 지겹지 않은 얘기인가 큭큭,
식으면서 뜨거워지는 모래사막 속으로 우리는 나란히 걸어갔다
박미란 시인 / 조각전
물고기 눈과 새의 날개가 가슴에 박힌 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물고기 눈은 저녁이 되려 하거나 전생을 떠올리지 않았고
새의 날개는 우레를 그리워하거나 지하세계로 날아가는 법을 잊어버렸다
한번 떠나오면 돌아갈 수 없다고 누가 말했을까
새들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는지 물고기는 어떻게 물살을 갈라야 하는지
물고기 눈과 새의 날개가 서로 가야 할 곳도 돌아올 곳도 잃어버린 채 심장에 나란히 박혀 있다
박미란 시인 /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
오래 버티던 그녀가 쓰러졌다
아름다운 중심과 술렁이는 가지 끝 목구멍에서 흰 피가 솟구쳤다
비가 내렸고 벽오동이 가장 먼저 찾아와 찢어진 입으로 밥 받아먹고 있었다
세상은 사시사철 빗속이거나 진흙탕물이라고 잠이나 실컷 자둬야 한다는 잎도 있었다
한때 그녀는 수천 개의 잎을 가졌다 버리지도 거두지도 못한 입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날마다 어둡게 빛나면서 자랐다
모든 잎들이 한꺼번에 거대한 입속으로 빨려들고
그녀가 지고 흰 달이 뜰 때까지
죽은 입들이 떠돌아다닌다
숨 죽여 새잎이 돋아나려면 얼마나 많은 입과 소원이 필요한 걸까
그러니까 아득한 것들이 더 아득해지기까지
박미란 시인 / 조개처럼
다시는 입 다물 수 없어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아마 입 벌리고 싶었을 거야 붉은 속울음 보여주고 싶었을 거야 벌어지고 나니 도무지 입 다무는 방법을 모르는데
그 벤치 위의 저녁, 정신없이 걷다가 발길 끊어진 후에야 물기 번지듯 갔지 오로지 번지고 번져서 갔지
번진다는 건 다가가는 일이라는 걸 내 삶이 망가진 다음에야 알았지
뜨거움이 지나간 그때 그 자리에서 아, 벌어진 입 끝내 다물지 못하고
박미란 시인 / 왼쪽과 오른쪽 사이
죽기 전에 다시 기저귀 찬 할머니, 이제 자기 몸도 따로따로 논다 왼쪽은 방바닥에 누우려 하고 오른쪽은 정자나무 아래 살살 나가려고 한다
한 몸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이리저리 쏠리는 것은 두 식구가 살기 때문이다
가지고 갈 게 없다 하면서 손가락의 쌍가락지 잠시도 빼지 않는 저 마음은, 오른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 듯하지만 사실 오른쪽과 왼쪽은 죽자고 붙어다니는 사이여서 어느 한쪽도 놓을 수 없다
금방 바스라질 것 같은 몸 눕히고 서둘러 나오는데 벌컥, 방문 열고 굶겨 죽이려느냐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저 힘
죽음에 질질 끌려가던 왼쪽이 오른쪽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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