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송희 시인 / 천년 묵은 은행나무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7. 08:00
송희 시인 / 천년 묵은 은행나무

송희 시인 / 천년 묵은 은행나무

 

 

금산 보석사엘 갔어요

거기 천년도 더 묵은 은행나무 있거든요

천년 바람 지나가고

천년 구름 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문 이 몸의 타래란 말이지요

지긋지긋하게 좋은 것과 눈길조차 스치고 싶지 않은 거

미치게 닿고 싶은 것과 끝내 만나지 않은 거

다 지나갔다 말이지요

썩고 구린 거 달고 쓴 거 다 삼켰단 말이지요

시커먼 아궁이만 남았단 말이지요

그게 다 사실이란 말이지요

그게 다 꿈이란 말이지요

그 많은 이력을 가지고도 아무 기억이 없는 나무

부풀대로 부푼 품이 가늠되지 않는 나무

이제는 뭐가 매달리든 떨어지든 개의치 않는 나무

폐허이며 생성인 그 기운에 대고

사람들이 두 손 모아 뭔가를 얻으려는 모양인데

난 도통 무렴해져서 똑바로 바라보기 민망하잖아요

무슨 염치가 있어야지요

나무의 오랜 生동안 헛기침 한 번 보탠 적 없거든요

 

 


 

 

송희 시인 / 너의 혀는 늙었다

 

 

그 말을 들어도 낯설지 않다.

이미 여름보다 가을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심장 또한 굵직한 주름잡혔다.

혀가 단단했던 죄로 눈화살이

혓바늘에 꽂히기도 하였던가 사랑하는

친구를 스승을 잃기도 했던가

"너의 혀는 늙었다"고 해도

이제 슬겅슬겅 슬프지 않다.

혀 또한 나의 부분이고 상처 난 자리엔

단단한 살이 차오르는 것

혀를 빠져 나간 독이 삭아서

눈이 더 깊게 패었다는 것

내가 핥은 시간만큼 이제

혀는 주굴주굴해졌다

힘을 놓아 좋은 게 얼마나 많은지

고이지 않은 세월을 보면 안다.

 

-시집 『탱자 가시로 묻다』, 《시와 시학사》에서

 

 


 

 

송희 시인 / 왼쪽 콧구멍에 사는 달

 

 

 숨이 서걱거려 달과 해가 드나드는 통로를 봤지요. 왼쪽은 달이 들락거리고 오른쪽엔 해가 드나들어요. 코벽 모퉁이를 돌아 천 리쯤엔 요철도 있어요. 달이 지나가다 넘어진 저수지, 시퍼런 공포가 떠내려가지 않았어요. 물벽을 잡고 넝쿨을 뻗었던가 봐요. 비틀어져 굳었어요. 선잠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먹이통 밖으로 날아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달이 맘대로 드나들지 못해서 난 늘 왼쪽이 아파요. 가끔 막힌 달빛을 뚫어 보려 하죠. 해가 제 가슴을 두드려요. 오른쪽 콧구멍에 사는 당신의 팔뚝을 휘감고 간신히 일어나기도 해요. 곁이라는 공간, 이럴 듯 저럴 듯 시간을 말며 굴러가죠.

 

 내 왼쪽 콧구멍에는 달이 살아요.

 오른쪽 콧구멍에는 당신이 살고요.

 

 


 

 

송희 시인 / 연두

 

 

덜컥, 저 연두만 보면 당신도 심장이 내려앉지?

 

푸르르 감전이 되지?

 

손톱만 한 게 정곡을 찌르며

 

다물고 있던 꿈을 말하는 것 같지?

 

처음 부딪혔던 그 눈빛에 바로 닿지?

 

쿵, 저 연둣빛만 보면

 

 


 

 

송희 시인 / 그 별빛 사라졌어도

 

 

그대는 나의 꿈이라

 

밤하늘의 별을 세던

그 시절은 가버렸어도

 

호수의 일렁이던

그 별빛은 사라졌어도

 

사랑의 그리움으로

사랑의 외로움으로

가슴을 송두리째 앗아가

 

아직 잊히지 않는 그대

그대는 나의 우상

 

 


 

 

송희 시인 / 해당화

 

 

신께서 눈부신 꽃에는 가시를 걸치라 했나 봐요

가시 옷을 입고 도시로 간 장미가 있지요

난 바닷가에 살기로 했던 걸까요

다행히 파도가 밤낮없이 웃어 주고

바람은 늘 만선이어서요

비린내 짠 내 뒤집어쓰면서도

진분홍 사랑을 피웠어요

한 칸이지만 옹골진 방도 얻었고요

이만하면 커다란 복이지요

어디나 발 딛어 뿌리내리면 살 만하다고

내 얼굴에 씌게 됐나 봐요

바다 한쪽에 이름을 올리게 됐어요

겉은 사나워도 애인 있어요

 

- 시집 <고래 심줄을 당겨 봤니>에서

 

 


 

 

송희 시인 / 비 오는 날, 솔가지 끝

 

 

물방울들이 가을빛을 쌩쌩 달고 있어요, 행여 떨어질세라

대야만한 마음만한 마음이라도 받쳐두었어요.

새들이 쪼아먹어도 쏙쏙 다시 쏟는 물보석을 가슴께에

심으면 좋겠지요. 저걸 꿰어 누구에게 보내야 하나. 바느질 상자를 열어요.

그대와 날 멀리까지라도 굴려 깨어져 하나 크게 하나되는  그런

목걸이가 되겠지요. 더구나 솔가지가 빚은 구슬이어서

숨도 푸를 거라고 아침 씨앗들이 이 가을을

훅, 발아시키네요.

 


 

송희(宋熹) 시인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2003년 시집 『탱자가시로 묻다』 『설레인다 나는, 썩음에 대해』 『고래 심줄을 당겨 봤니』.  2003년 전북시인상 수상. 전북문학상. 前 전북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