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리영 시인 / 하드보일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7. 08:00
이리영 시인 / 하드보일드

이리영 시인 / 하드보일드

 

 

한쪽 문만 열린 트럭 화물칸을 보면

들어가고 싶었다

 

죽고 싶다는 친구에게

부패하는 사체의 이미지들을 전송했다

 

이곳에서는 얼마의 빚이 줄지 않았다 어제의 베개에 어제의 냄새가 가시지 않았고 필요한 건 내일의 칫솔과 돌아올 계절에 신을 구두라 믿으며

 

가끔씩 갇힌 사람을 떠올렸다

잠긴 화물칸 속

 

어둠에서 어둠으로 실려 다니는

 

지하철을 기다렸다 연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육중한 트렁크를 끌고 가는 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죽고 싶다는

 

친구에게서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죽었다는 확신으로

이상한 실체와 이상한 믿음의 간격으로

 

삶은 끊김 없이 계속되었다

 

 


 

 

이리영 시인 / 도끼

 

 

 어느 날 그가 집에 돌아와 보니 거실 한가운데 도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듯 도끼가 놓인 바닥은 움푹 패여 있었다. 도끼는 즉사한 생명처럼 고통의 흔적 없이 고요했다. 천장이 조금 낮아졌을 뿐 모두 그대로였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추락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하고 있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그는 도끼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찍어 죽였다. 다음날 도끼가 놓인 부서진 바닥에서

 

 풀이 돋아났다. 풀이 에워싸자 도끼는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그는 날마다 물을 주었다. 풀이 우거져 도끼가 파묻히자 그는 나무 한 그루 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도끼는 빛을 품기 시작했다. 그 빛은 밤낮 번개처럼 번쩍이고는 그의 귀에 흘러들어 흐느꼈다.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 그의 숨통을 누르자 그는 도끼로 바닥을 닥치는 대로 내려쳤다. 다음날 부서진 바닥 어디에서도

 

 나무는 자라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없었다.

 

 그는 무성해진 풀숲을 헤쳐 적당한 틈에 두 발을 집어넣고 꼿꼿이 섰다. 천장은 더 낮아져 고개를 깊숙이 숙여야 했다. 시간은 물소리를 내며 흘렀다. 그의 피부는 나날이 거친 수피가 되어갔다. 어느 날 그의 벌어진 입에서 나무줄기가 뻗어 나오자 도끼는 스르르 일어서 그의 종아리에 박혔다. 다음날 피투성이 나무의 벌어진 상처에서

 

 


 

 

이리영 시인 / 이민자 블루스

 

 

사람들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한 남자가 아들에게 두 번째 언어를 배우는 지혜를

설명하려고 애쓰며 말한다.

 

아버지와 나에 대한

지난 세기의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나와 내아들에 대한

어제 아침과 같은 옛날 이야기.

 

그것은 "생존 전략 그리고

인종 동화의 우울함"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실향민의 심리적 패러다임"이라고 불립니다.

 

"공부보다 놀고 싶어하는 아이"라고 불립니다.

 

당신 안의 언어를 느낄 때까지 연습하십시오,

남자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언어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아버지

그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당신 안에 있습니까?

한 번 전화로 물었던 사람,

나는 육체와 영혼에 대해 혼란스러워 합니다.

 

넌 항상 내 안에 있어, 여자가 대답했다.

공간과 시간속에서

육체의 유한함과 평화롭게,

영혼의 무시와 평화롭게.

 

내가 당신 안에 있습니까? 나는 한 번 물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누워,

몸과 마음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

 

당신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몸의 탐욕과 함께, 마음의 당혹감과 함께

평화롭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저녁의 옛날 이야기입니다.

 

"디아스포라 민족의 사랑의 패턴"이라고 불립니다.

 

"고향의 상실과 사랑하는 자의 오염"

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노래하고 싶지만 나는 어떤 노래도 모릅니다."

 

 


 

 

이리영 시인 / 어항​

​오랜 식민의 땅처럼 축축합니다 이곳은

모든 계절이 낙인처럼 찍혀 있지요

작고 등근 어항을 샀습니다 금붕어는

붉은 실에 꿰어 목에 걸었습니다 곧 죽을 것을 알지만

지금은 살아있으니까요 내 몸속으로 밀어넣으면

어디쯤 자리 잡을까요? 어항을 머리에 쓰고

커졌다 작아지고 작아졌다 커지는

내일이 어제로 어제가 내일로

한밤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곤 합니다

내게 도움을 구하는 소리일까요?

날 도우려는 걸까요?

비밀은 의심하는 자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고, 이곳을

그만 나가고 싶어질 때면

거실 한복판 낡고 균형이 맞지 않는 나무 탁자를 바라봅니다

어항을 탁자에 두고 영영 떠난 사람을 떠올리며

어디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금붕어처럼

붉은 지느러미를 바닥에 드리우고 다시 잠에 빠져들고

 

 


 

 

이리영 시인 / 덩굴기계

 

 

이 방을 쓸고 닦느라

손가락들이 다 비틀어졌는데요

 

더 비틀려 되돌아오는 길을 찾는 중이었데요

 

먼지 한 톨 남지 않은 방에는

커다란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기계음은 뼈가 자라는 소리

기계음은 뼈를 자르는 소리

 

거의 다다른 손가락들이 손바닥을 파고드는데요

 

무엇도 증명할 수 없었어요

잘린 손가락을 기계 위에 그대로 두고 떠난 사람처럼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리영 시인 / 홈리스

식탁 아래 잠든 소년은

젖은 장화가 마르는 동안

여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유리컵에 물을 따라

다른 소년에게 건네주려던 사이

컵은 사라지고

물무늬만 어른거려

못 하나 박힌 텅 빈 벽처럼

자라나는 건 너무나 쉽고도 어려워

소년은 두꺼운 책들을 사랑했다

그런 소년을 둘러싸고 푸른 여인들이 노래했다

어느 저녁 녹슨 빗장이 풀려

창문이 열리고

도서관이 보였다 불 켜진

서고 사이 텅 빈

책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이가 있었다

소년은 눈을 뗄 수 없었다

*

너의 투명한 이마는 정오의 태양 아래 빛나는 비석,

포석이 깔린 이 길을 너는 떠나온 곳만을 바라보며 거꾸로 걷는다,

너는 지금 막 이 광장에 도착하고, 광장 한가운데 첨탑 종을 바라보고,

아무리 기다려도 종은 울리지 않아 눈물을 흘리고, 숨넘어가게 웃고,

실은 종의 추를

훔쳐 달아난 자들을 알고, 너는 그들의 흩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음악으로 간주하고,

다시 떠나온 너의 방 안이다, 사방의 벽이 읽어야 할 책이어서 펼치

면, 모든 문장을 읽어낼 수 있고, 모든 문장이 너를 예감한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면, 너의 두 다리가

긴 장화를 신고 모래언덕을 오르는 중이다,

분명 꿈속인데, 이 놀라운 디테일, 유리컵 속 오래된 날벌레의

날갯짓, 복도에 떨어진 검은 장갑

한 짝이 놓친 온기, 커튼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 저 불길한 책들이 스

스로 불타오르는 장관, 불붙은 책장들을 한 장씩 넘기는 섬세한

손가락들, 너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읽었기에 덮는다, 그러므로 너는 이국의 짙푸른 호숫가에 앉아

아직 떠오르지 않은 것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수면 아래에서 어둡게 다

가오는 것이 그날 너의 방에 파헤친 구덩이처럼 점점 커지는 것을

뚫어지게 본다,

뒷걸음질 치면 순식간에 암전,

너의 투명한 이마는 변함없이 구덩이 앞을 지키고,

*

소년은 노변 벤치에서 깨어났다

비명에 가까운 악취

마침내 커다란 나무와 나무가 만든

견고한 아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년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길이 하나라 길을 잃었다

​-시인동네 2019년 1월호

 

 


 

 

이리영 시인 / 나의 시네마테크

 

 

끝나지 않기를

아니, 시작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제의 티켓을 쥐고 있다

 

영사기사는 창구멍으로

무엇을 엿보고 있나

 

죽은 빛이 쏟아지기 시작해

 

검은 뺨 검은 눈물 검은 문을 지나 검은 들판

검어지기 전에는 내 것 같지 않던 것들

 

쓰러지는 자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일어서는 장면을 놓칠까 봐

 

아름다운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갇혀

 

거대한 장막의 뒤편을 다

메우려 어지럽게

 

춤을 추지 옷자락마다 자라나던 검은 잎사귀 검은 불길

 

허상에 지쳐가던

불이 의자에 옮겨 붙었다

 

두 발이 다 타들어가도록

엔딩을 기다린다

 

죽은줄도 모르고

 

 


 

이리영 시인

1972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의류환경학과 졸업.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학과 석사과정 수료. 2018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