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석 시인 / 낮과 밤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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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 시인 / 낮과 밤 집을 나서기 전 얼굴을 깨끗이 씻어야 해 손바닥으로 무언가가 끝없이 지나간다고 생각하면서 원적외선 테라피처럼 따뜻한 노을이 가득한 얼굴 당신이 전해준 어제의 눈 소식을 찬장 속 접시처럼 납작하게 가두고 집을 나와 물을 보면 물은 집이고 하늘의 눈으로 본다면 물은 얼음처럼 반짝이는 유리 낮게 따라 부른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 대신 공연장에 어렵게 도착한 가수의 가사를 빈 의자를 알아차리고 어둠의 소리를 삼키며 멋진 생각이 얼어붙고 녹기를 반복해 생긴 주름의 얼굴이었으면 접시가 갑자기 깨질 때 새가 불현듯 날개를 펼칠 때 사람들이 놀라서 흩어질 때 잠시 오지 않던 계절을 만난 것 같아 여름 분수만큼은 아니겠지만 솟구치는 손안의 힘으로 다시 노래를 시작한 느낌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침묵하겠지 어둠을 신겨 아직도 걸어 들어오는 중인 현관에 흐트러진 구두들처럼
박정석 시인 / HR* 강 보러 가자 한 말이 바다 보러 가자는 약속만 같아서 한동안 흰 밤을 뒤척였지만 그 약속도 기약 없어지고 마침내 서로를 마주하며 조약돌 같은 눈망울 반짝이는 눈동자 강인 양 바다인 양 바라본다는 것 행인지 불행인지 당신의 수위와 나의 수위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늘 같은 식당을 빠져나와 가까운 찻집에 들고 좌표가 낯익은 산책길만 찾아서 헤맸네 우리를 밀어내는 우리라는 인력 때로 나의 수위가 당신의 수위를 맞출 수 없어 나는 새로 생긴 심장을 탓하며 고백 점프하고 싶었지만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것도 우리라는 언덕 그러다 기대게 되는 것도 악수를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악수를 통해 무엇을 숨길 수 있는가 사랑을 모르는 사람처럼 사랑을 사무를 처리하듯 사랑을 사무로 끝맺고 당신 같은 당신 나 같은 당신 당신 같은 나 나 같은 나 우리를 끌어당기는 우리라는 척력 차라리 어딘지 모르는 식당에서 어딘지 모르는 찻집에서 길 잃은 산책길에서 동양화를 그리는 당신을 모르는 사람으로 모르게 스치고 싶네 삿된 마음 적막한 위수지역 너머 영원한 바깥 사랑의 외곽에서는 분별없어 지금처럼 울지도 못하리 바다 보러 가자는 말이 강이라도 꼭 보자 하는 약속만 같아서 * HR: Heart Rate, 심장박동
박정석 시인 / 핀란드産 의자
바퀴가 없다 등받이가 없다 천사의 골반뼈가 묻혀 있다
박정석 시인 / 피스 로드
사랑 찾아 달려가자 평화 찾아 달려가자
참 아버지 그리울 때 참 어머님 보고플 때
땀방울 송골송골 두 다리로 두 바퀴로 달려가자
어화둥~둥~ 주신소명 다 이루어 함께 춤추며 웃음꽃 피는 그날까지
박정석 시인 / 과학실
너는 검정 커튼을 열어 보인다 나는 빨간 커튼을 오래 붙잡는다
이 방은 이상한 이름을 가졌다
너는 일찍 웃었고 나는 차갑고 쓸쓸해진다
익숙한 액체 냄새가 난다
나는 너의 입술에 걸려 있다 붉은 시약처럼
명찰을 잠시 보았던 것도 같다 이 방은 포개어진 비커가 많다
날아가는 액체의 솜과 잔인한 유리병
마스크 밖으로 입김이 만져진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5월호 발표
박정석 시인 / 눈
도시의 심장 같은 로터리에 차가 엉켜 있고 트레일러가 지저분한 백합꽃을 돌돌 말면서 지난다 눈이 어깨 위를 마지막으로 밟고 갈 때 가로수는 순종적으로 눈을 턴다 내리는 눈이 인간을 밟는다 나는 환호한다 매저키스트처럼 그러나 누군가는 슬퍼해야한다 하얀 눈과 하얀 눈 사이에서 차는 납작해지고 타기도 전에 얼어버린 하얀 불꽃이 침엽수림에서 솟아오른다 어깨도 없이 눈을 맞는 가로수의 자세 나로부터 멀어지는 이야기 눈은 도시를 중독시킨다 아파트는 밀가루를 뒤집어쓴 거인 같고 버스는 조랑말처럼 몰려다니고 눈이 설탕이라면 아이스크림 동산을 만들 수도 있다 생각하는 사람처럼 눈을 맞는 자세에 대하여 사랑하는 사람처럼 눈을 녹이는 몸짓에 대하여 연습하는 대신 눈사람이 만들어진다 눈을 녹여 커피를 타 마실 일도 없는 도시 캠프에 온 것처럼 낯설다
-월간 『현대시』 2010년 4월호
박정석 시인 / 조찬
일 년 남짓 지하주차장 조수석에서 도시락 까먹으며 나는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 당도했다 배고픔을 없애는 확실한 방법은 배고픔을 섬기는 일 즐겁지 않아도 좋아라 그러니까 허기의 종교화 반지를 삼켜버리는 도둑처럼 민첩하게
단식이 결국 제 살 뜯어먹는 일이듯 배고픔 끊는 길은 우선 배고픔의 심장이 되는 일 배부르지 않아서 좋아라 그러니까 허기의 인품화 삼킨 먹이를 토해내는 아나콘다처럼 거대하게
토스트 한 조각을 저작한 나와 곤죽이 된 한 끼 식사가 협력하여 배고픔을 생매장할 때 허기졌던 나는 차라리 잘 지어진 신전에 차려진 잿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식에 가로막힌 나를 생각할라치면 한 끼는 걸신을 위해 하루는 아귀를 위해 일 년을 악다구니처럼 야차처럼 버텨 못 참을 치욕도 없겠다지만
오늘 나는 지하주차장 조수석 깊숙이 들앉아 무릎 모아 무릎 위에 부린다 묘지 근처에 흩뿌려진 젯밥처럼 나와 먹으려고 찾아오는 혼의 음식을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박정석 시인 / 슬픔의 고딕체
폭포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비가 충분히 내린 이후이니, 때를 잘 맞추셨군요. 당연하지요. 저희는 프로입니다.
폭포수의 규모는 충분합니다. 실망스럽지 않군요. 역시 타이밍이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여기 오래 머물다가는 옷이 흠뻑 젖기 전에 먼저 목소리가 다 쉬겠어요. 그나저나 두꺼운 커튼 같은 폭포수는 절경입니다. 하늘로 이어지는 하얀 나무 기둥 같아요. 이 지역에 이렇게 거대한 나무는 없을 테지만요.
천만에요. 더 큰 나무가 자라는 곳을 알아요. 다음에 안내해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낮이 긴 계절이 적당할 겁니다. 걱정 말아요. 저희는 프로입니다. 이제는 제가 좀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이 폭포는 인근에서 단골 소풍 장소였습니다. 활기를 주는 물소리와 멋진 단풍나무숲.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과 살보다 더 잘 데워진 반석. 가으내 수척해진 폭포수는 안쪽으로 기운 벼랑에 붙어 나지막하게 흘러내리다 마침내 바닥을 향해 속절없이 수직으로 떨어집니다. 잘게 부서지면서 물이끼 가까이 부딪힙니다. 폭포수는 웅덩이를 가득 매운 낙엽 밑으로 애처롭게 스며들지요. 펑펑 우는 울음보다 비집고 흐르는 작은 눈물이 어쩐지 더 슬프지 않나요? 최대한 속으로 기울이는 벼랑과 투명한 눈물이 같은 한 겹이니까요. 누가 저랑 지금 폭포수 두꺼운 커튼 뒤편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겠어요? 여름 터널이라고 생각하시면 간단한데요.
그렇습니까? 글쎄요. 계획에 없는 일이군요. 물소리에 귀가 먹을 지경이에요. 물이 더 빠지기 전에 원경으로 사진을 얼른 몇 장 더 찍어두는 게 좋겠어요. 산골짜기 물은 금세 달아나거든요. 저희는 프로입니다. 아, 여름철만 있다는 폭포수 안쪽 동굴은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두는 게 어떨까요. 무엇보다 거긴 우선 그림이 잘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폭포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해 줄 수 있나요?
계간 『백조』 2023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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