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시인 / 그림자 군단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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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시인 / 그림자 군단
사람들 저마다 창틀 속으로 들어가 고요한 밤 몇 점 반딧불로 떠돌던 야경꾼 호루라기소리마저 철수한 도시 우우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창틀 속 아늑한 평화를 위해 골목길에 버린 귀엣말 삭제한 발언 꿀걱 마셔 버린 분노 스스로 헌납한 시민권 고요함의 이름 아래 육신을 잃고 제명처분당한 영혼들
이윤택 시인 / 늑대
빈들 마구 달렸어 갯바닥 풀섭 꾀꼬리알 훔치고 낮게 나는 새 모조리 잡아 먹었어 표범과 만나 돌밭 당당히 뒹굴었고 없는가 숲이 썩고 있어 부러진 상수리 옆구리 불 새고 있어 보이지 않아 도사리고 앉은 나무들 웅웅 매맞는 소리 어디 있는가? 생솔가지 불타는 밤 황홀하게 쓰러지는 휘파람 소리 밤에 핀 포도알 알알이 삼키며 눈부신 아랫도리 벗어 던졌어
이윤택 시인 / 춤꾼이야기
슬픈 노래가 너를 천국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슬픈 노래 흐를 때 슬픈 노래 지그시 밟고 빙글 멋지게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이 세상과 우리 사이 발이 있다 하나님은 발이 없지 막달레나 마리아도 내 발을 닦아 주었다 미스터 J 춤을 추세요 당신의 발 너무 날렵해 날아다니는 것 같애 나는 날지 않았다 스텝을 밟으며 욕심 없이 발자국 지우며 슬픈 노래 가득 찬 세상 손을 내밀었지 한 번 추실까요, 아가씨?
이윤택 시인 / 사람냄새
어느날 문득 내 몸 속의 피 우 들끓어오르며 눈두덩이며 사타구니며 툭 투욱 두드러기로 솟구칠 때 나는 신분증명서를 반납하고 시간표 밖으로 걸어나왔다 썰렁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외롭다
이윤택 시인 / 포스트 모던한 저녁 뉴스 한 토막
밥숟갈을 들면서
습관적으로 티브이 채널을 돌리는데
난데없이 연극배우 기주봉이 화면 속에 나타나 원망스럽게 날 쳐다본다
대마초를 피우다가 쇠고랑을 찼다는데
다른 연예인처럼 얼굴을 가리지 않고
형사계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지도 않고
MBC-TV 공영 카메라를 삐딱하게 받고 서서
불편한 심통으로 날 쳐다본다
내가 세상에 기대한 것이 없는데
왜 날 가두는 거냐
뭐 이런 눈길로 세상을 노려보는데
나는 그만 밥 먹다 말고
지금 절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선 슬픈 광대
살아 있는 연기를 본다
이윤택 시인 / 참나무
참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그래 내가 물었다 참나무야, 너는 어떻게 늙어 가니?
가능한 시선을 멀리 두고 살지 그러면 아직 나를 중심으로 별들은 순행하고
하루 쯤 늦은 신문이라도 받아 볼 수 있겠지
좀 외진 곳에 살더라도 그늘을 넓게 확보 하는 게 좋아 지금 세상은 빛을 너무 받아 지랄발광하지 깊게 패이고 썩은 몸에서 맛 나는 버섯이 자라고 딱정벌레 같은 가족은 내 몸에서 흐르는 진땀을 먹고 산다네
그러나 나는 시간을 담는 그릇 언젠가 허옇게 마른버짐 피우며 부러지겠지 그때는 군불 떼는 땔감 그때가 사실 내 삶의 철정이지 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면 탁, 틱, 툭 짧은 외마디 비명 그대로 숯이 되겠지 숯에 스며든 격문 같은 시 전사 같은 삶 그대로 천년 쯤 시간을 견디며 사람을 기다리고 있겠지
이윤택 시인 / 맑은 음(音)에 대한 기억
내가 휘파람을 배운 건 일곱 살 때다 여름이었다. 맑은 음이었다. 나는 휘파람으로 이 세상을 유혹하고 싶었다. 역시 일곱 살인 내 사랑... 천변 건너 그 여식애의 집 ...그 주변 다리 밑 동천강 동천강의 피라미떼 내 맑은 음이 닿는 세상은 둥글고 따뜻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논리를 익히고 기하학을 배우면서 내 사랑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휘파람을 잃었고 우린 심심찮게 말다툼을 했고 그때부터 세상은 내 삼각자 밑에 놓인 도면이었다. 그때부터 난 염증을 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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