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문 시인 / 당신은 곁에 없고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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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문 시인 / 당신은 곁에 없고 -춘화첩
이 빗소리
감나무 가지를 적시듯 몸을 두드리네
비라는 것은 이 빗소리를 함께 듣는 것, 감잎처럼 돋아나네
당신과 함께 이 빗소리를 듣고 싶은 것, 맨 처음 이것의 이름을 붙인 것은 누구인가
이 빗소리가 몸을 두드려 잎사귀를 깨울 때마다 잔을 내밀었으리, 당신 쪽으로
이 빗소리, 빗소리를 듣는 이것은 무엇인가
빗소리에 돋아나는 잎사귀를 빗소리에 우려
내미네, 당신 쪽으로
장철문 시인 / 갓등 아래
저 중에는 하루만 살고 가는 것들 그냥 아하, 이게 사는 거구나 하고 가는 것들 사는 게 그저 알에서 무덤으로 이사 가는 것인 그런 것들 불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지럽게 원을 그리는, 도무지 뭐랄 수도 없는 것들
이 마음에는 한순간 왔다 가는 것들 너무 빨라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 몸을 알리는 것들 안팎의 경계에서 그저 잉잉거리다 마는 것들 스러진 뒤에야 그 잔상이나 남기고 가는
그마저 거두어지는
장철문 시인 / 어머니가 쌀을 씻을 때
얼마나 겁이 났을꼬, 내 새끼가 얼마나 숨이 막혔을꼬. 숨이 끊어지기 전에 억지로 억지로 모질게도 숨이 끊어질 때 얼마나 살고 싶었을꼬, 내 새끼가
이 쌀 씻는 소리를 들을 수 없구나, 너는 바가지를 기울일 때 늘어나는 이 그늘을 볼 수 없구나 이 뜨물내를 맡을 수가 없구나
아가, 내 아가 너는 어디로 가서 이 다 된 저녁에 네 방에서 기척을 낼 수 없는 거냐
에미 손으로 씻어서 안친 따순 밥 한 술 멕여서 보내고 싶은 내 새끼야
장철문 시인 / 오월 낙엽
아이는 새잎처럼 자라고, 나의 비유는 끝이 났다 올해 나는 잣나무 잎 지는 시기를 새로 알았다 송홧가루 날려 새잎 돋을 때다 꽃가루가 먼지와 섞이고 새잎에 빗방울 꿰일 때 나의 비유는 끝이 났다, 수맥이 옮겨간 숲처럼 나의 언어는 죽은 새의 부리처럼 갈라졌다 실뿌리에 축축하던 습기는 사라졌다 바라던 대로 오월의 산빛은 비유의 바깥에 있다 바라던 대로 파도와 비애는 언어의 바깥에 있다 비유는 죽고, 나만 앙상하게 남았다 내 생의 최대의 비유가 생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언어는 바닥을 드러냈다 변명의 여지도 없고, 불입할 낙장도 없다 오늘 잣나무가 쭉정이를 떨어뜨리는 시기를 새로 알았다 질펀하게 깔린 잣잎 위에 열매를 맺지 못한 작년의 잣송이들이 즐비했다 절필(絶筆), 아니면 녹음(綠陰)일까? 그 어느 쪽도 소식 없다
장철문 시인 / 고막이 터지는 때
사랑이여, 지금은 꽃이 미어져나오는 때 너와 나의 것이 막무가내로 삐져나오는구나 네 가슴이 소란으로 터지고 내가 겨울 건너온 가지처럼 피폐할 때 내가 믿지 않은 것이 비집고 나와서 잊혀진 지뢰처럼 터지는구나 이 폭발을 위하여 너와 내가 걸레쪽처럼 찌들어서 사냥개와 오소리처럼 물어뜯었구나 지금 피어나서 사라지는 수수백천만의 불꽃처럼 화염처럼 스러지고 또 피어나는구나 이 소란을 위하여 너와 내가 장다리처럼 말라 보트라지고 뿌리가 짓물렀구나 사랑이여, 지금은 검은 생강나무 가지에서 노란 꽃무리가 눌러 쟁인 울화처럼 열꽃처럼 터지는 때 마른 껍질 밑으로 물을 끌어올린 산버들 가지에서 새 새끼 주둥이 같은 잎사귀들이 삐져나와서 고막이 터지는 때
장철문 시인 / 우동과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우동을 먹으러 간다 마음이 허기를 수락하고 힘줄로 하여금 페달을 밟게 한다
주택가의 오르막과 내리막 과속방지턱을 넘어서 페달을 밟아 우동을 먹으러 간다
구르는 바퀴의 속도를 돌이켜 페달을 거꾸로 돌리면 언제나 허기가 주인이었다
이 허기 때문에 들 넓은 외가外家의 쌀밥이 눈에 선했고 이 허기가 뒤늦게 낯선 도시의 공무원이 되게 했다
어머니는 출가하겠다는 아들을 뒤세워 삼겹살을 끊어다 구웠다 ―이거 묵고 그냥 살자 어머니의 인증이 문풍지처럼 떨렸다
12시부터 1시까지는 평상 끝에 참새처럼 걸터앉아 기다린다 기껏 먹는 것이 냄비우동이다
허기가 시켜서 상수도가 터진 길을 후룩, 휘릭, 바퀴를 굴려 우동을 먹으러 간다
장철문 시인 / 두려움에 바치는 노래
썰물이 유난히 멀리 물러나는 밤이었습니다 그 밤에 썰물 물러나는 소리에 깨어서
수평선을 넘어 가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어머니에게 들은 할머니의 마지막 숨이 꼴락 넘어가는 소리를 생각했습니다
그 밤에 썰물이 물러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밀려왔다 다시 물러나고 물러났다 다시 밀려오는 것을 새삼스레 알았습니다 소리의 멀고 가까움에서 물의 멀고 가까움을 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에 가서 엉기고 또 흩어지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따라 엉기고 또 풀리는 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려운 것은 물소리가 수평선을 넘어 가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어나고 스러지는 소리에 일어나고 스러지는 마음이 스러져버릴 것이 두려웠습니다 마음에 일어나고 스러지는 몸이 스러져버릴 것이 두려웠습니다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듣는 내가 모래톱이 쓸리듯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소리를 붙들고 일어서는 내가 수평선을 넘어서 꼴락 사라져버릴 것이 두려웠습니다
수평선을 향해 가는 새의 날개가 시야 밖으로 나가버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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