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오철수 시인 / 내가 부르는 노래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9. 08:00
오철수 시인 / 내가 부르는 노래

오철수 시인 / 내가 부르는 노래

 

 

나는 그런 시를 쓰고 싶었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자기도 몰래 넘 좋아져

사랑을 고백하고

수줍어 하고

때론 다투고 웃고

함께 걷는 이야길

 

그런 이야길 쓰고 싶었지

6일은 열심히 일하고

쉬는 날이면

사람들 모두 하늘이 있는 곳으로 나가

화들짝 피고

돌아오는 길엔

약간의 술로 목을 축이는

그런 모습을 노래하고 싶었지

수선스런 정류장을 바라보며

집집마다 불을 켜는 골목을 걸으며

사람들은

모두 사랑하고 있으리라

어디만큼 지치고 외로운 한 사람조차

잠들고 있으리라

 

나는 그런 시를 쓰고 싶었지

내일은 골고루

햇살을 뿌리며 올 것이라고

찾아온 아침의 얼굴에 입맞추며

영원히 노래하고 싶었지

 

 


 

 

오철수 시인 / 돌배꽃

 

남준이랑

남준이랑

별 말 없이 종일 술 먹고 밤새 울다가

너무 환해

깜박잠서 깨어 산방문 여니

눈부시어라, 거기서 천 년 기다리던 여자

순한 팔때기 하나 내 가슴속으로 꾸욱 밀어넣고

하얀 꽃 켠다

후룩 진다

웃음도 눈물도 하얗다고, 저 돌배꽃

운다

 

 


 

 

오철수 시인 / 눈물겨운 아름다움에 대해

 

고참이 '죽어라'하면 죽는시늉까지 하던

이십 여 년 전 군에 있을 때 일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정리정돈을 검사 받는 살벌한 시간

담당 하사관이 사병에게 온 편지를 나누어주었다.

그날따라 편지를 받은 사람이 한 명이었고

그에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읽게 했다.

그 사병은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못하고

삼십 여명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낭송했다.

그의 아픔이야 어쨌든 달콤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갇혀 있는 혈기왕성한 사내들에게 그것도 여자의 연서란.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 그 사병은 읽기를 주저하였고

편지읽기를 지시했던 상급자가 수틀렸는지

군기가 빠졌다며 나머지 사병들에게 머리박아를 시켰다.

분위기를 알아차린 그 사병은 마지못해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의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자기야, 내 보지 잘 있어. 자기 자지도 잘 있어? 죽겠다."

원산폭격 자세였던 이십 여 년 전 그때

우리는 세상이 터져나가라 웃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운다.

어차피 조잡할 수밖에 없는 생이 서러워서가 아니라

그처럼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또다시 볼 수 있으랴 하는

생각 들어서

 


 

 

오철수 시인 /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대요

사람사는 일이 그러노라고

 

살구꽃 치렁대는 노루목고개

한톳 바람 지나듯

 

세월가면 잊혀진다대요

있던 일도 없던 것처럼

 

하루종일 퍼붓던 햇살

숨어버리듯 그렇게

 

하루종일 퍼붓던 햇살

숨어버리듯 그렇게

 

 


 

 

오철수 시인 / 우리 사랑이 무겁고 괴롭고 슬플 때면

 

 

우리 사랑할 때면

들꽃을 생각하자

뿌린 이 누구인지 몰라도 늘

그를 닮아

세상의 다른 곳에 눈을 주지 아니하고

물 주고 가꿈 없이도

스스로 뜻 영글며 사뭇

기다려 온 날

거두울 그이 다시 소식 없어도 오히려

제 몸을 솎아버리며

딱딱한 각질 속 서러운 눈물 감춘

그리움을

 

우리 사랑할 때면

긴 풀섶 아무 말 없이 잊혀져 가는

들꽃을 생각하자

그리고 이 다음 해이어든

다시 그리운 이 맞기 위해 목을 내놓고

그 목

여위며 피어나는

우리 사랑이

무겁고 괴롭고 슬플 때면

그 밖으로 나와

들꽃을 보자

 

 


 

 

오철수 시인 / 조치원역

 

 

모든 사랑은 멀리서 오고

가장 가까이서 멀어져 가나니 거기

조치원역 있다

만나기 위해 갔던 곳

떠나기 위해 다시 있던 곳

역광장 시계탑 위로 제비꽃빛 같은 시간이 머물 때면

그대 저만큼서 조금씩 커져 내게로 왔던가

아는가, 꽃불로 타오르던 사랑

하지만 싣고 가는 기차에겐 경유지만 있는 것

멈춰선 곳에 이별도 있어 거기

사랑은 지고 조치원역 있다

오늘 문득 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아득한 이름이여! 거기쯤

아직도 돌아가지 못한 사내 서성인다, 눈부신

그 자리

가버린 시간 있었으니

오는 추억도 있어

새잎 나는 버드나무처럼 밝고 선한 여인

늙지도 않는 거기 조치원 역

 

 


 

 

오철수 시인 / 가을과 나

 

 

가을하늘에

쪽빛 눈물을 뿌리고 싶다.

슬퍼서도 아닌

괴로워서도 아닌

지난날 시기와 질투 속에

미워했던 병든 마음 들을

저 맑고 고운 하늘에

내가뿌린 눈물로

고이 헹구어 내고 싶을 뿐이다.

 

가을호수에

‘풍덩, 빠져들고 싶다.

하늘과,

구름과,

산과,

나무와

산새들의 날갯짓 까지도

모두모두 품어 않은 맑은 호수(湖水)에

이 몸도 고이 가두고 싶을뿐이다.

 

가을꽃들에게

가슴 가득 담아두었던

내밀한 사연들을 속삭이고 싶다.

부모에게도,

연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스런 이야기들

가을 들녘을 피워낸 꽃들에게

남김없이 속삭이고 싶을뿐이다.

 

 


 

오철수 시인(雲谷)

1958년 인천 출생. 국민대 기계공학과 졸업. 1986년 <민의>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아버지의 손> <먼길가는 그대 꽃신은 신었는가> <아주 오래된 사랑> <아름다운 변명> <조치원역> <독수리처럼> <사랑은 메아리 갗아서>.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 노동문학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1990년 전태일 문학상 수상. 현재 사이버노동대학 문화교육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