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시인 / 언어의 양성평등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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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 / 언어의 양성평등
기울어진 운동장에 질문들이 쏠린다
효자상품 있어도 효녀상품은 왜 없는가 바지사장은 있는데 치마사장 못 찾겠네 자궁은 남자 아기 집, 그럼 여자 아기 집은 어디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안 낳는 것도 여자들 탓 저 출생을 저출산이라 굳이 말해야 하나 여교사 여의사 등은 여씨들의 종친회인가? 여중 여고 있어도 남중 남고는 왜없지?
아직도 멀고 먼 세상, 평등하게 가는 길
《세모와 네모가 만나》 제주시조시인협회, 2022
김영란 시인 / 게메마심*
섬에선 나무들도 바람의 눈치를 본다
머리채 잡혀 끌려가던 북촌마을 머귀나무도
"예"인지 "아니오"인지 끝내 답을 못 했나
직립을 포기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거 봐
무자년 섬사람들의 생존의 그 화법처럼
쉽사리 꺼내지 못한 채 맴돌고만 있었지
* '글쎄요'의 제주말
-시집 《연못과 오리와 연꽃》에서
김영란 시인 / 서른일곱의 낯선 이름
너에게 가는 길엔 암호가 걸려있어
내 이름은 써니 선희 순희라고 했던가 널 찾아 헤매다보면 내가 자꾸 무너져 나라고 믿었던 난 어디서 왔는지 눈 작고 키 작은 난 어디서 왔는지 갓 눈뜬 4개월생 서쪽으로 보내놓고 별처럼 떴다 지는 비밀번호 신복순, 그 이름 하나 믿고 찾아온 대한민국 신복순 내 엄마, 서른일곱의 낯선 엄마
한 번은 불러봤을까 먼 시간 속 그 이름
-《좋은시조》 2021.여름호
김영란 시인 / 나무의 시
생각대로 산다는 건 쉽지만은 않았어요
머리와 가슴이 엇갈린 그 길 위로
바람이 기척할 때마다
휘청이는 당신과 나
-『연못과 오리와 연꽃』 고요아침, 2023
김영란 시인 / 슬픈 자화상 ― 나혜석을 다시 읽으며
꽃이 피었다 한들 그대 위해 핀 건 아냐 금지된 소망 앞에 슬픈 꽃말 피어난다고 세상에 맞춰 살라는 그런 말 하지 마 수없이 피고 지는 삶이 곧 사람인 걸 덧칠해도 더 불안한 세월은 마냥 붉고 한 시대 행간을 건너는 여자가 거기 있네
-『누군가 나를 열고 들여다 볼 것 같은』, 시인동네, 2020.
김영란 시인 / 두가시*
삼십 년 살았어도 모르는 게 더 많아
기 싸움 줄다리기도 승패가 나질 않아
후생엔 만나지 말자 용케 그 뜻 일치하네
제주해협 건널 무렵 멀미가 심했는지
가시버시 오던 길에 버시만 떼어놓고
아득히 멀고도 가까운 두가시만 남았네
*부부의 제주어
-《시와문화》2023. 가을호
김영란 시인 / 동백 졌다 하지 마라
탄압이면 항쟁이다
마지막 저항 같은,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운명의 뿌리 같은,
핏줄이 핏줄에게 보낸
무언의 당부 같은,
-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2,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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