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 45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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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 45 -늦가을
겨울로 가는 길이 보인다
바람에 시든 풀들이 뿌리로 돌아가고 구름을 얹은 산은 잠자듯 누워 있다
봄내 여름내 꽃으로 열매로 키워온 꿈들은 땅에 떨어져 한 알 씨앗으로 썩어 가고
내려 쌓이는 잎새들은 잃어버린 아름다움과 젊은 날의 이야기를 귓속말로 주고받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겨울나무처럼 옷을 벗는 것 옷을 벗고 빈 들에 서면
겨울로 가는 길이 보인다
서승석 시인 / 심장
처음에는 눈동자였다
그대 눈 속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것이 기쁨이었다
다음에는 손이었다
그대 손길이 닿으면 내 가슴의 빙하는 녹아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심장이었다
땅속 깊이에서 용암으로 끓어오르는 사랑이었다
서승석 시인 / 벚꽃
죽어가는 시간의 눈부심을 깨우며 꽃잎은 꽃을 떠나 한잎한잎 허공을 맴돌다 더러는 차창에 더러는 풀섶에 내려앉는다
매달려 있는 그리움의 부질없음 현기증 같은 봄 햇살은 하늘하늘 날다가 떠돌다가 추락하다가
이 세상에 왔다 가는 모든 것의 소중함을 껴안은 채 꽃잎은 회오리바람을 타고 나비처럼 비상한다
한낮의 짝짓기로 봄을 허물어뜨리는 슬픔 그리고 아름다움
-시집 『사람 사랑』 동학사, 1998년
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3 -겨울
노래의 한 끝이 풀려 있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와서 여름에 죽고 겨울에 피는 잎의 푸른 음질音質을 키운다
결빙하는 시간 속으로 비늘 돋는 햇살의 이 차가운 단절 솟구치던 욕망이 꺾인 날의 흩어진 눈물을 다시 본다
아 아 맨몸으로 두 손을 들어 그대의 하늘을 안으며 나는 잘 빗질한 머리로 슬픔을 쓸고 나뭇가지 끝에 풀린 노래의 한 가닥 흔들리고 있다
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7 -유배지의 꽃
목숨이 춥다
용암보다 뜨거운 피를 끓이며 달려온 어둠의 시간들 아직도 대지의 끝은 빙하로 덮여 있다
촛불을 켜고 고독의 비늘을 하나씩 온몸에 문신하는 유배지의 겨울
죽음을 넘어서 만나는 사랑의 기쁨으로 눈 속에 핀 꽃 봄은 멀리서 온다
서승석 시인 / 파리 장 ―조레스역 근처
꼬박 마흔 해 전, 난생 처음 파리-솔본느대학에 공부하러 갔었지 책보따리를 푼 것은 징-조레스역 철그덕거리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 때도 바로 지금 추석 앞둔 가을 입구 길가의 마로니에 잎새 물들고 있었지 깊은 정글 속이나 사막 한가운데 쯤 내 혼자서 나를 달래고 있을 때 문득 찾아든 서울 길손 있었지 떠날 때 오를리 공항에서 내 손수건을 흠뻑 젖게 했던 그 사람 돌아가 보내온 편지 한 줄 ―“운다, 메트로의 빈칸 종점에 닿는 네 사랑을” 나 지금 그날로 돌아가 그를 파리의 그 역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
서승석 시인 / 백자 항아리
달이 떴어요
불가마 속에서 불을 먹고 텅텅 속을 비우고 겨우 얻은 사랑 하나
오랫동안 밤이었던 나는 말이 없는 달이 되고 싶어요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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