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 45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30. 08:00
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 45

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 45

-늦가을

 

 

겨울로 가는 길이 보인다

 

바람에 시든 풀들이

뿌리로 돌아가고

구름을 얹은 산은

잠자듯 누워 있다

 

봄내 여름내

꽃으로 열매로 키워온

꿈들은 땅에 떨어져

한 알 씨앗으로 썩어 가고

 

내려 쌓이는 잎새들은

잃어버린 아름다움과

젊은 날의 이야기를

귓속말로 주고받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겨울나무처럼 옷을 벗는 것

옷을 벗고

빈 들에 서면

 

겨울로 가는 길이 보인다

 

 


 

 

서승석 시인 / 심장

 

 

처음에는

눈동자였다

 

그대 눈 속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것이

기쁨이었다

 

다음에는

손이었다

 

그대 손길이 닿으면

내 가슴의 빙하는

녹아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심장이었다

 

땅속 깊이에서

용암으로 끓어오르는

사랑이었다

 

 


 

 

서승석 시인 / 벚꽃

 

 

죽어가는 시간의

눈부심을 깨우며

꽃잎은 꽃을 떠나

한잎한잎

허공을 맴돌다

더러는 차창에

더러는 풀섶에 내려앉는다

 

매달려 있는 그리움의

부질없음

현기증 같은 봄 햇살은

하늘하늘 날다가

떠돌다가

추락하다가

 

이 세상에 왔다 가는

모든 것의 소중함을 껴안은 채

꽃잎은 회오리바람을 타고

나비처럼

비상한다

 

한낮의 짝짓기로

봄을 허물어뜨리는

슬픔 그리고

아름다움

 

-시집 『사람 사랑』 동학사, 1998년

 

 


 

 

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3

-겨울

 

 

노래의 한 끝이 풀려 있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와서

여름에 죽고

겨울에 피는 잎의

푸른 음질音質을 키운다

 

결빙하는 시간 속으로

비늘 돋는 햇살의

이 차가운 단절

솟구치던 욕망이 꺾인 날의

흩어진 눈물을 다시 본다

 

아 아 맨몸으로

두 손을 들어 그대의 하늘을 안으며

나는 잘 빗질한 머리로

슬픔을 쓸고

나뭇가지 끝에 풀린 노래의 한 가닥

흔들리고 있다

 

 


 

 

서승석 시인 / 자작나무7

-유배지의 꽃

 

 

목숨이 춥다

 

용암보다 뜨거운 피를 끓이며

달려온 어둠의 시간들

아직도 대지의 끝은

빙하로 덮여 있다

 

촛불을 켜고

고독의 비늘을 하나씩

온몸에 문신하는

유배지의 겨울

 

죽음을 넘어서

만나는 사랑의 기쁨으로

눈 속에 핀 꽃

봄은 멀리서 온다

 


 

 

서승석 시인 / 파리 장

―조레스역 근처

 

 

꼬박 마흔 해 전, 난생 처음

파리-솔본느대학에 공부하러 갔었지

책보따리를 푼 것은

징-조레스역 철그덕거리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

때도 바로 지금 추석 앞둔 가을 입구

길가의 마로니에 잎새 물들고 있었지

깊은 정글 속이나 사막 한가운데 쯤

내 혼자서 나를 달래고 있을 때

문득 찾아든 서울 길손 있었지

떠날 때 오를리 공항에서

내 손수건을 흠뻑 젖게 했던 그 사람

돌아가 보내온 편지 한 줄

―“운다, 메트로의 빈칸

종점에 닿는 네 사랑을”

나 지금 그날로 돌아가 그를

파리의 그 역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

 

 


 

 

서승석 시인 / 백자 항아리

 

 

달이 떴어요

 

불가마 속에서 불을 먹고

텅텅 속을 비우고

겨우 얻은

사랑 하나

 

오랫동안 밤이었던 나는

말이 없는

달이 되고 싶어요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서승석 시인

1956년 경기도 평택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수학 및 불문학 전공. 파리 4-소르본대학교 대학원비교문학석사 및 불문학 박사. 1995년 시집 『자작나무』를 출간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자작나무』 『흔들림에 대하여』 『사람 사랑』 『그대 부재의 현기증』,  한불대역 시집 『흔들림에 대하여』 등. 번역서 『피카소 시집』. 덕성여자대학교, 수원대학교 겸임교수, 서울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교류의원, 국제펜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