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배경희 시인 / 흰색의 배후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30. 08:00
배경희 시인 / 흰색의 배후

배경희 시인 / 흰색의 배후

 

 

그녀의 그림들은 조용해서 춥다하고

색색의 소리까지 흰색에 갇혔다며

꽃들의 본색만 찾아 아름답다 수근댄다

 

사과는빨갛다는 고집스런 집착 속에

총알 한 방 놓는다 중심 뚫고 지나가듯

의미가 파편들 속에 흰색이라 읽는다

 

-『시조학』, 2015 겨울호.

 

 


 

 

배경희 시인 / 노마드

 

 

원고지 백면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고

또 시작인가 하다가

비행기 또 날아가고

소리가 맑을수록 풀들이 쓰러진다

 

더위가 몰아칠 듯 공기가 가라앉고

폭탄을 투하하듯 햇볕씨 촘촘 박는다

현기증 극서정일까

우르르 쾅! 저 여우비!

 

누구에겐 리얼리즘 안전한 일상이지만

길 중간에 서성이는 이유 있는 노마드

결론은 미정이었다

바람 불어 괜찮다

 

 


 

 

배경희 시인 / 맨드라미 신곡

 

 

어두운 숲에 있었다고 죽은 자가 말하네

맨드라미 몽상이 육체의 보행을 하듯

욕망은 붉은 내장처럼 눈동자를 태웠네

 

뭉텅이로 비대해진 무성한 호기심은

도마뱀 어둠을 먹고 여우를 사랑했네

모서리 뭉친 먼지처럼 우리는 젖었네

 

낯설은 햇빛 속에서 젖은 몸을 말렸네

모르는 척 아무 일 없었다고 의혹을 닦았네

어느 날 여우가 사라졌네 맨드라미 더 붉어졌네

 

-《시조21》 2023. 겨울호

 


 

 

배경희 시인 / 무서운 사과들

 

 

천장 위에 쥐들이 우당탕탕 뛰어다녔다

 

고양이도 밤새도록 야오옹 거렸다

 

쿵쿵쿵 묵직한 발소리

 

다락문이 흔들렸다

 

도둑인가 어떡하지 엄마는 언제 오나

 

이불 속에 덜덜 떨며 숨죽이다 잠들었다

 

날 밝자 문을 열었다.

 

사과들이 쏟아졌다

 

《열린시학》2023. 여름호

 

 


 

 

배경희 시인 / 검은 DNA

 

 

칠판을 긁었다, 날카로운 금속성

 

뇌 속에 인지되는 저 비명이 나는 싫다

 

거대한 공룡이었을까 몸을 숨기고 있나

 

뭔지는 모르지만 무서운 게 틀림없어

 

먼 옛날 혹시 나는 고라니 염소였을까

 

내 몸속 기억하는 것, 강한 것의 두려움들

 

연둣빛 풀들 사이 검은색이 꿈틀한다

 

천년의 고요를 심장 속에 감추었나

 

한겨울 바람 소리에도 온몸이 붉어진다

 

-시집 『사과의 진실』, 시인동네, 2022.

 

 


 

 

배경희 시인 / 염전

 

 

바람 불어 풀씨가 경계를 넘어간다

다른 풀이 되기까지 매화리 소금꽃은

 

물 안의 고향의 구름

절박한 삶이었다

 

아버지 주름진 목은 길어지고 깊어진다

기억의 마지막처럼 봄이면 보이는 사람

 

그때의 너의 몸을 딛고

깽깽이풀 자란다

 

노을이 저물어가는 염전을 바라본다

가슴 속 칠면조가 검붉게 응결되는

 

검푸른 옹기판 위에

소금 물고기들 퍼덕거린다

 

-《시조정신》제12호春/夏

 

 


 

 

배경희 시인 / 콘트라베이스

 

 

싸구려 여인숙 앞 풀밭을 남겨놓고

 

바람이 가출했다, 새소리가 안 들렸다

 

신앙은 촛농처럼 녹아

양의 뿔을 만들었다

 

구름은 멈춰 있고 경우만 남아 있는

 

기억 많은 의자는 바람을 생각했다

 

마음은 고이는 것 없이

늘 떠나고 없었다

 

풀밭을 오래오래 애착했다 내놓았다

 

벨이 울렸다 살 거야, 한 마디 남겨놓고

 

까치가 숙박부에서

내 이름을 꺼내 읽었다

 

-《가히》 2023. 창간호

 

 


 

배경희 시인

충북 청원 출생. 경기대학교 대학원 한류문화콘텐츠학과 석사과정 졸업. 2010년《서울신문》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흰색의 배후』. 2010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선정 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