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 시인 / 사랑은 그런 것이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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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 시인 / 사랑은 그런 것이다
꽃 하나 여물기를 기다리는 시간 가슴에 별이 돋도록 울어야 하는 길지 않은 시간
여자만 바다는 가슴을 열어 길을 내었고 달과 함께 그 길 당신의 집 앞에 닿아 있었지
모두의 꿈이 발화된 씨앗이 되어 봉명동 근처 그늘 속에 숨어 듬성듬성 자라 바람을 지칠 때 공중을 딛고 선 마음 하나 달무리로 자리잡을 무렵 고향 집 마당에 감꽃이 지고 있었다
물 자국도 지우기 어렵게 누군가의 마음 결에 기대어 하염없이 들숨과 날숨으로 직조된 바닷물처럼 스멀거릴 때
사무친 깊은 온기 하나가 싹을 틔우고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메주를 띄우는 것처럼 아랫목에서 숙성되기 기다리는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한다
-시집 <여자만의 달과 지리산 칸타타>에서
박재홍 시인 / 모성의 만다라 8
깜박, ‘꽃처럼 흔들렸다’ 바다 위는 달이 길을 열었고,
슬그머니 걸어서 오는 엄니, 꽃처럼 웃으시네
아들 노곤함 쓰다듬고 가을 저녁처럼 웃으시네
박재홍 시인 / 도넛을 먹으려면 알고 먹어야 해
도넛을 너에게서 배웠어 달뜬 사랑 같은 맛이 느껴져 당 떨어진 날이면 손이 가고는 했지 수요일이면 상자째 사다가 먹기도 하고 책상 위에 놓인 마음으로 찾아오기도 했지 나이 오십의 중반을 지나는데도 다국적 기업에 내몰린 젊은 노동자들의 눈 속에 든 슬픔을 읽지 못하고 중독된 충성도만을 생각했었어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려면 아이들에게 뿌리내리는 법을 가르쳐 주려면 소비도 올바르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해 도넛을 너에게서 배웠지만 이제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가르치고 싶다 도넛을 먹으려면 소비하는 이유에 대한 정당함을 배워야 한다고 알려주어야겠어
박재홍 시인 / 정월밤
내리는 눈의 뒤를 밟는 바람은 열아홉 된 슬픔을 만나고자 고향을 향했다 마을 어귀에서 서럽게 서성이는 기다림이 있다 오늘은 어느 산정 달 아래 머물며 사슴처럼 울고 있을 것이다 별도 더디게 돋는 그믐밤 밀물처럼 들어설 아프게 틔운 청매화 체향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정월 밤에는 음복주에 아득하게 잠드는 이들이 무리 지어 산다
박재홍 시인 / 갈참나무 숲에 깃든 열네 살
비 오는 숲속 소로에는 갈참나무 무리 지어 섰었지 덮고 누운 낙엽 아래, 방공호에 숨어 마려운 똥을 내려놓았는데 굴참나무 무 리가 어깨를 흔들어 숨겨 주었지
그 후로 40년이 흘러 거름이 된 시심은 모자 쓴 상수리와 도토리처럼 깊은 그늘 속으로 숨었지 반추할 기억 속 손에 신발을 끼고 기어 다니는
친구도 없는 열네 살 장애인 박재홍
-시집 『갈참나무 숲에 깃든 열네 살』 (실천, 2021)
박재홍 시인 / 하찮은 존재
“누군가, 내가 속한 아프리카도 정상은 아니지만 ’퍼스트 아메리카‘를 주창하게 된 미국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말에 판문점에서 남과 북 경계를 넘나드는 트럼프의 ‘퍼포먼스’는 面厚(면후)였고,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고 9년을 미국에서 산 아일랜드인의 말을 빌면 미국의 가치와는 상당히 다른 사실을 깨닫고 유럽인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던 가치로 회기를 꿈꾸는 새가 되었다. 그것은 黑心(흑심)에서 비롯된 ‘불공정하고 부당하고 어리석은 행위’ 또는 ‘앙심’ 때문에 포스트 아메리카는 ‘응큼한 마음에서 비롯’된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박재홍 시인 / 못대가리를 쳐내며
대나무 평상의 골 사이로 쑥향이 소슬거리고 있을 무렵, 아버지는 모깃불을 등불 삼아 흔들거리는 와상의 귀퉁이를 두드려 흔들거리는 정도를 가늠하며 자잘한 못을 추려 하나를 골라 못대가리를 돌 위에 놓고 망치로 내리치고 있었다
달빛에 번들거리는 아버지의 어깨 근육은 체 게바라 눈빛처럼 맑았다 전복을 꿈꾸는 사람들의 광기에 쇠의 권력은 무상했다 노동은 신기(神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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