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란 시인(김제) / 와잠(臥蠶)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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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시인(김제) / 와잠(臥蠶)
캄캄한 얼굴에 은연히 반월이 새겨졌다 미모사가 갈대처럼 늘어서 있는 안와(眼窩)의 골을 따라 솟아오른 작은 민둥산, 오랜 시간이 떠밀려와 쌓인 그 황지(荒地)는 새들도 찾지 않는다 바람은 연신 마른 하상에 모래무덤을 돋우고 가뭇없는 날들이 분연히 일어서는 곳 회한만이 굽이마다 떠도는데 아무도 건너가 본 적이 없는 가파른 저 산비탈엔 고적(孤寂)한 사면에 서풍만 가득하다 깊숙이 흐르는 강물은 아무도 모르게 타이머를 내장하고 있다 자신의 이력을 소상히 기억하는 무덤은 한 시대의 일면을 구깃구깃 접어가는 중이다 허허실실 보낸 날들이 망연자실하다 층층이 용서와 화해의 쪽문을 지나 이제야 넉넉하고 구순해진 나는 아직도 닿지 않은 먼 기항지를 향하고 있다
- <서정시학> 2018년 가을호
이영란 시인(김제) / 겨울별서(別墅)
먼저 긴 굴뚝을 장만해야 합니다 검은 연통을 희다 흰 채로 통과하는 그런 고집스런 자세여야만 합니다 물은 늘 흐르는 물이어야 합니다 물통을 들고 키 작은 버드나무 얼음꽃이 가득 핀 그런 물가까지 가서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물길을 뚝 끊어다 놓고 연기가 다 빠진 불로 차를 끓여야 됩니다
창문은 혼자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추위들이 비집고 들어올 문틈이며 벽 틈쯤은 모른 척해야 합니다 뒤꼍 바람벽에 걸어둔 시래기에 파란바람이 버석거리는 동안 들쥐가 쪼르르 숲 쪽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뒷산을 긁어와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 무쇠솥은 들썩이며 제 힘을 과시합니다
내리다 만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바뀌고 고샅은 막히고 고립무원이 될 것이므로 이른 아침 은빛 머리를 정갈하게 빗질해야만 하겠습니다 겨울 별서엔 몇천 평 흰 눈의 습자지가 있지만 필력은 쉬이 녹고 마는 것이라 다 제때가 있을 것입니다
키가 적당한 나무를 마당에 세워놓고 여러 가지 새들의 언어를 들어야 합니다
이영란 시인(김제) / 즐거운 쇠락
오래된 골목이라면 지겨울 만도 할 것인데 녹슨 철문을 넘어 능소화가 넘친다 이 집엔 팔월만 가득하다고 후덥지근한 마당 끄트머리를 밀고 철문을 넘는다 들어오는 시절은 끝이라고 이젠 쇠락을 밀고 이 집을 나갈 차례라고 우거진 넝쿨이 문 밖으로 꾸역꾸역 넘쳐 나오고 있다 우르르 몇 번의 이사로 빠져나간 집 더 이상 안쪽이란 안쪽은 없을 것 같은데 굳게 닫아건 문이 있고 그 문을 열고 나오고 싶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듯 몸은 집에 두고 마음만 길 밖에 세워놓을 때 살짝 지나가는 빗방울에도 팔월의 바닥은 능소화꽃송이들로 넘친다 쇠락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겠지 누군가 빈 병 하나를 담장 안으로 던져 넣으면 쨍그랑 소리를 곧바로 던져내는 저 집은 빈집이지만 이 골목에서 가장 환한 팔월이 독채 삼는 즐거운 쇠락 담장 안의 꽃들은 대개 담장 밖을 분란시키지만 팔월은 낮아서 뒤꿈치도 없이 담을 넘는다
이영란 시인(김제) / 불구
몸에서 나온 그림자를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을 수는 없어도 구겨 넣을 수는 있다 그때 몸은 불구가 된다
나무의 그림자가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각자 다른 방향에서 나무에 들어가듯, 들어가서 절그럭거리듯 한낮으로 흘러나온 그림자가 어둑한 저녁으로 들어간 몸은 쓰러진 잠이 된다
일그러진 기형을 달고 다닌 한여름 한낮은 쉴 새 없이 땀이 난다
한번 들어간 기형은 불구로 굳어간다
말에도 기우뚱 숨어 있는 검은 그림자가 직진을 버리고 말은 늘 진중(塵中)을 헤매고 있다
균형을 잃은 실사(實寫)가 전유물이 된, 사실 모든 말들은 다 불구다
머리도 꼬리도 아닌, 비루한 행태를 보인다
한번 구부러진 몸짓을 교정하기 위해 평생의 교정을 허비한다
이영란 시인(김제) /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
기슭에서 출발한 수영은 반드시 기슭을 잡는다 어제는 두 곳의 장례식과 한 개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모두 반복했고 닮은 꼴이었다
닮지 않은 날이 기쁜 날이었다
나날이 건너다니는 징검다리는 첫돌과 마지막 돌이 감쪽같이 닮았지만 우리는 젊을 때 가졌던 결의와 다짐을 어디선가 물에 빠뜨려 잃어버렸다 그때 잃어버린 계율이 떠오르고 일정한 몇 개의 패턴들처럼 물은 흘러간다
어제와 내일은 얼굴도 없이 슬그머니 도둑같이 다녀가지만 혹은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은 영락없이 사고 여객기처럼 길게 연기를 날리며 불온한 기억의 숲 너머로 사라지곤 한다
제일 많이 닮은 것은 맑은 날의 하늘과 흐린 날의 지붕들이었다 닮은꼴로 나는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반복을 위해 남자들 사이를 지나다녔다 닮은 날들이 나를 지우고 갔다
그래도 세상은 나름 친절하였다 갑자기 늙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서로 닮은 이쪽인지 저쪽인지 알 수 없는 기슭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이영란 시인(김제) / 생인손
푸른 정맥으로 감싼 몇 개의 봉우리를 보아왔다 정점에 선 여자는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렸다 아이 셋을 바깥에 남겨두고 소실로 건너간 여자 불온한 소문들이 팝콘 터지듯 요란했다 한복 입은 선이 맵시 나던 그녀는 힘겹게 양쪽을 오갔다 살짝 추켜올린 추녀 끝 같은 단아한 비례가 유난히 돋보였던 여자 부정不淨과 부정否定으로 맞서면서 금박의 스란치마에 찍은 화인火因은 화사했다 주인 없는 너른 마당엔 목단꽃이 해마다 속절없이 다녀갔다 나무는 한층 더부룩이 자라있었고 시간은 뒷걸음 칠 줄 몰랐다 공 굴리듯 앞으로 앞으로만 막연한 기다림을 알아차릴 무렵 저들끼리 어두운 궁륭에서 아이들은 단풍같이 철들어갔다 여며놓은 체면도 해악질도 엷은 하루는 또 다른 하루와 맞닿아 있어서 우리의 고정된 시선도 별빛도 시야에서 흐릿해져 갔다 잎새에 늘어붙은 자줏빛 꽃잎 하나 바라진 꽃술에선 자르르한 분내가 여전하다 꽃은 며칠간의 개화를 넘기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시집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 에서
이영란 시인(김제) / 오십과 육십 사이
스무 살 즈음엔 섬에서 섬 사이 조각배를 젓는 중이고
서른이 넘으면 여름 깊은 강물 헤엄치는 일이며
마흔에는 산꼭대기 출렁다리를 건너는 것이란다
오십에서 육십은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섬 강물 출렁다리를 오가는 중이라며
스무 살의 나는 누구였을까, 조각배를 젓다가 어디쯤에서 뒤를 돌아보았을까 서른의 나는 얼마나 깊은 강물을 헤엄치며 허우적거렸을까 출렁다리를 무서워하는 나의 사십은 나에게서 잘 떠나간 걸까 나를 토닥이며 잘 견디었다고 스스로 위안도 해 보는 오십 여기, 앞으로 펼쳐질 육십은 나와 또 다른 나 사이로 참 깊은 설렘이 찾아오겠지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시곗바늘이 슬며시 내 손을 잡는다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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