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환 시인 / 말없이 살아가는 것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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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환 시인 / 말없이 살아가는 것
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가 하는 말을 듣자니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었을 때 무수하게 쏟아내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받아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간직해 두기를 바랐었는데 일곱 번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담기 힘든 말로 인해 무너지는 자구책을 써야만 했습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방의 성충이 나무의 살을 깍아내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상처를 키워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지면을 버리고 짐을 챙켜 한때 수몰지구였던 근처에 가서 잎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눈물이 내려앉을 때였는데 나무가 내게 쏟아내는 말이 너무 많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종이 한 장에 달빛만 얹어 돌아왔습니다
최규환 시인 / 그날의 일기
아버지 가시고 팔순이 넘는 어미의 늑골과 허릿살을 베어 먹은 내가 오늘의 밥상에 앉아 단상을 즐긴다 하루에도 수백 번 들썩이다가 해가 진 골목을 들어설 때 알았다 뿌리를 거두지 못하는 한겨울 목침을 안고 누워있을 때 알았다 구절초 이파리가 빛에 짓눌려 마지막 겨울로 돌아온 후 어미의 늑골과 허리에 엮어진 줄기가 삭아 있었다는 거, 그게 내가 받아야 할 대물림이란 걸 아버지 가시고 뼈들이 강물에 풀어졌다 모일 때 뿌리가 하늘로부터 뻗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최규환 시인 / 찾아오는 시 혼자 울면 시가 찾아오는가 내장이 쏟아진 길고양이 주검 앞에서 눈물 쏟아낸다고 시가 찾아오는가 옷깃 여미는 날 갈대밭에 선 바람맞은 여인의 우수를 본다고 시가 찾아오는가 우는 것은 죄다 비극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것이 많은 거여서 내게 찾아오는 시는 어쩌면 오지 않을 것을 향한 속정에서였던 것 헤어진 사람의 두태를 닮아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 울컥이는 심장 그런 순간을 들켜버린 오후에 불현듯 새가 날고 초목이 시퍼런 낯짝으로 나를 볼 때 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골목에 들어 반짝이는 돌이 내 눈에만 보여 슬몃 섬광처럼 눈빛 하나 던져주는 것 눈 감고 귀를 닫아야 찾아오는 희소병 같은 것이라고 -시집 『동백사설』, 상상인, 2022년
최규환 시인 / 동백사설
바람이 제 키를 높여 깊은 그늘을 데려다 자라는 마음이 있다
밤이 기우는 겨울 냇가엔 빛이 소금밭에 뿌려져 나무 곁에 앉았다
얼굴을 떠올리지 않고도 스스로 생성의 빛을 만들지 않고도 저 혼자 익어가는 뜨거운 바다 곁에 누워 볼 수 없는 먼 하늘을 향해 여기는 다만 겨울 외투로 뜨락에 머무는 초록이었음을
빛을 내려주는 생이 바닥에 누워 숨을 고르는 사이 거름을 주고 난 후 한철 낮잠에 드는
눈 녹아 이랑에 스미는 고요를 위해 몸의 비늘을 거둬야 새들과 짝을 이루는 마음이 있다
최규환 시인 /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행간 3
마지막 키스와 뒤엉킴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에 힌 표를 줘야겠다 아스팔트 스키드마크처럼 할킨 자국을 남겨둘 사이 상처만 고스란히 기억하는 무렵
꽃이 제 몫에 떨구다가 스러지는 것이 좋아 마음을 두고 떠나는 게 좋아 바스러질 때
하늘의 방향을 몰라 사랑은 그만큼의 깊이에서 티끌도 되지 않았음을
그게 너와 나의 사랑이고 한때의 기억조차 남기지 못함을 아는 우리가
향을 피워 올리는 무덤가 다시 꽃이 피고 새벽달은 구름을 앉혀 나부끼다 아침을 맞곤 했다
향하는 길이 이곳엔 없다는 것에 한 표를 줘야겠다
-시집 『 동백사설 』 2022. 상상인
최규환 시인 / 반성
아버지 기일 납골당 면전에 피울 향보다는 물릴 수 없는 가까운 약속만 떠올리며 애초에 그른 생이었다 싶어 바다만 보다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허물이 낯선 간격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 수천 번을 반성해도 뉘우치지 못하는 게 많아 어둠을 읽는 게 익숙할수록 눈물이 뜨거워지는 이유
자주 하늘이 무너지는 걸 생각했다
최규환 시인 / 너의 가끔 생각했다
삼척 지나 후포항에서 소슬한 비가 내리고 파도가 내뱉는 습기로 인해 가끔이 주는 선명함이 오랜 기억보다 뜨거워서 너의 가끔이 생각나는 날
시래깃국을 안쳐놓고 맑은 향이 번지는 가까이에서 낡은 신발을 바라보던 눈빛이 슬퍼 보인 날 너의 가끔이 손님처럼 찾아와 초인종 누를까 싶은
어쩌면 우리는 가끔으로 와서 잠시의 가끔으로 가는 것 같아 먼지 날리는 방 안의 거룩을 담아두려는 것이다
내가 너의 먼발치였을 때도 얼룩이 든 벽면으로 와 있을 때도 너의 가끔이 내 가끔 보다 더 찬란해진 식은 국을 먹으며
바다의 향이 예상치 않은 소식을 들고 병문안 삼아 들어와 상한 무릎에라도 펼쳐질 것 같은
너의 가끔 생각했다
이번 동백사설에서 유난히 나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 오는 단어는 별과 빛이다. 내가 왜 닉네임이 빛이야 인가 명상하면서 내 안의 빛을 만났기 때문이다 별 역시 동작분석을 하면서 내 안의 가득한 별빛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 그럼 나 역시 이 시집만 받고 있었겠는가 아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그 작가의 모든 책을 보려고 하고 기회가 되면 읽는 편이다 이번에 동백사설 도착하기 전에 시인님 이전 시집을 찾아보았다. 시집을 함께 읽고 있다 읽고 있는 느낌은 시인의 글 속에는 시인 특유의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림 하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시집들을 읽지만 그 글이 생각으로 다가오는지 상념이 되어 오는지 그리움이 되는지 상실로 오는지 중요한 것은 그 본질에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게 중요하다
시집은 나랑 맞아야 읽어진다. 그렇다면 나랑 맞아야 읽어지는 시집을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난 셈이다 나는 운이 좋은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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