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영하 시인 / 물을 끓이면서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1. 08:00
박영하 시인 / 물을 끓이면서

박영하 시인 / 물을 끓이면서

 

 

물을 따르면서

그래

이렇게 사는 거야

천천히 물을 컵에 따르며

아주 평온함을 느꼈다

사람 사는 것 같은 느낌

1초 동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숨 쉬는 나의 신체 모든 것이

아주 천천히 내려오는 그 순간은

사람 사는 것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생애 처음 느껴보는 느낌

그래

이렇게 사는 거야, 사람은.

그러나

사람은 늘 바쁘다

말할 때 바쁘고

남보다 선수 칠 때 바쁘고

자기의 발언이 남 질세라 앞서고

모든 일에 앞서야 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불안전하다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작은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 보자

나의 삶이 과연 어느 경지에 닿았을까

우리는 모두 1초 동안의 짧은 시간이지만

펄펄 끓는 좁은 주전자의 입에서 흐르는 물을 보자

얼마의 질서가 있고 얼마나 잘 참는가를

그 입이 작은 주전자에서

 

-시집 『오늘. 창문이 얼지 않았다』 영하(1993) 중에서

 

 


 

 

박영하 시인 / 다락방에서

 

 

없는 시력의

도끼눈을 뜨고

"네 자신을 알라"라고 한

소크라데스를 사랑할 동안은

슬프지 않았다

고독하지 않았다

그립지도 않았다

어둔 다락방에서

습기 뿐인 이슬에 젖어

눈뜨지 않은 태양을 사랑하며

침묵보다 더 깊은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가

무거운 그림자 하나

건져 내고 있는 동안은

행복했다

 

 


 

 

박영하 시인 / 바다에 가는 길

 

 

바다에 가는 날은

기대를 버린다

 

바다에 가는 날은

욕심도 버린다

 

바다에 가는 날은

원망도 버린다

 

바다에 가는 날은

멀리 보이는

 

그 섬

하나도 지워 버린다

 

 


 

 

박영하 시인 / 석류꽃

 

 

그리운 눈빛

다시는 만날 수 없어도

그 이야기는

세월속 꽃이 되어

능금처럼 익어간 영상

 

기존 도덕이 공해로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깊은 밤도 잊어 버리고

잔잔하게 부르던 그 노랫소리

이제는 들을 수 없어도

순박한 뒷모습이 무지개처럼 떠오른다

 

낙옆 냄새 짙은 밤

그 모습

다시는 찾을 수 없어도

그 이야기는

내 가슴에 석류꽃으로 피고 있다

 

 


 

 

박영하 시인 / 눈꽃 그대에게

-아오모리 센다이로 가는 길

 

 

말 없이 서 있는 그대 눈꽃

꽁꽁 얼어붙은 눈꽃 사이로

나는 그대의 마음을 묻고 싶소

천만 년 차가운 가슴을 안고

그 교차로에 말없이 서 있는 그대

그대의 차가운 가슴만 가질 수 있다면

나의 가슴은 춘삼월 눈 녹듯이 녹을 테요

 

 


 

박영하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한성대학교 교육대학원 행정학 석사. 1993년 월간 '순수문학' 창간. 현재 발행인. 한국시인협회 이사, 여성문학인회 이사. 저서 <의식의 바다>, <이름없는 풀꽃들의 마을> 외 다수, 제33회 올해를 빛낸 최우수 예술인 상. 월간 순수문학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