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권지영 시인 / 우월한 유전자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1. 08:00
권지영 시인 / 우월한 유전자

권지영 시인 / 우월한 유전자

 

 

오산 물향기수목원 뒷마당에

세로티나벚나무

큰 키에 긴 팔 벌려 벤치를 감싸 안고

시원한 그늘 선뜻 내어준다

 

초여름의 땡볕을 감내하고

검붉은 입술 당차게 내밀며

새콤달콤한 세월

부지런히 빚어내고 있다

 

한 웅큼의 낭만을 따서 그이 손에

한 아름의 사랑즙을 내어 엄마 입에

한 병의 배려주 담가 친구와 나누고픈

과한 유혹에 잠시 빠져드는 오후

 

까치들을 위한 만찬인가

뒷마당 한가득 성찬처럼 차려진 새알

까치, 공중에서 사뿐히 착지하며

정신줄 내려놓고 거침없이 새알에 입 맞춘다

 

봄엔 스스로 주인공 되는 꽃 축제로

여름엔 지친 이들 쉬게 하는 그늘 보시로

가을엔 허기진 이에 나누는 새알 보시로

생명들 끌어 모으고 있다

 

배려 낭만 사랑이 익어가는

벚나무 곳간에선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보다

깊고 우월한 유전자의

木心 드러난다

 

 


 

 

권지영 시인 / 시간의 바깥

 

 

나는 지금 시간 속에 있다

그는 나의 몸 어디에도 스치지 않으나

나는 그의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그의 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나는 그 안에서 가끔 울음을 멈추며

그의 텅 빈 어깨에 기대어 멍하니가 되기도 한다

어디선가 어둠을 깨며 부스럭거리는 별빛 하나

그의 손끝에 닿은 허공이 어둠만을 토해낸다

삶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가슴이 말라버려

별 보는 일도 잊어버린 날들

언젠가 당신을 만난다면

별똥별이 수놓는 그곳에서

시간의 바깥에 서고 싶다

 

 


 

 

권지영 시인 / 오 촉 전구 같은 사람

 

 

깜빡 깜빡 전멸되는 형광등처럼

잊은 듯 만났다가

다시 헤어져도

크게 아쉽지 않은 사람

 

집에 가는 길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에 문득

어묵을 같이 먹자고 할 사람

 

못난 속사정 다 얘기하고

밤새 들어주고 나누어도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사람

 

간절함으로 부르는 이름이 아닌

가볍게 흘려버리듯 살아가는 인연

 

백 촉짜리 번쩍이는 찬란함이 아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짝

바로 눈앞을 밝힐 수 있는

오 촉짜리 빛이 되는 사람

 

바람에 스치듯 지나가도

언제든 생각나면

좋은 사람

 

 


 

 

권지영 시인 / 아득

 

 

당신에게 다녀온 봄날

먼 곳에서 돌아온 것처럼

하루가 아득하다

 

하얀 가슴 내보이는 달의

은빛 그늘 아래로

풀벌레 소리 푸르게 빛나던 밤

 

살아내며 마주한

무수한 소음과 침묵 속에서

 

다시

기다리는 일이

견디는 일만큼 뜨겁다

 

 


 

 

권지영 시인 / 펜데믹

 

 

마스크를 줄 서서 산다

요일별로 산다

나눠서 산다

사지 않는다

 

영화에도 없던 장면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밥을 따로 먹고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마침내 재난영화가 현실이 되고

공상과학영화가 다가오고 있다

아무도 미래를 믿지 않는다

볕 좋은 날

누구도 꽃구경을 가지 못한다

 

봄날의 축제가 바이러스로 죽고

구원받으려는 자들은

자비 없이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헌금으로 지은 궁전에는 늙은 여우 하나

무심한 세월을 쌓아올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공작원처럼 곳곳에 퍼진 바이러스

 

오랑시에서 건너온 쥐들이

십자가로 몰려들었다는 소문은

감염병처럼 퍼졌다

잡고 뿌리고 잡고 뿌리고

쥐들이 숨을 데가 없어 손을 들었다

구원은 가장 낮은 데서부터 온다

아직도 착한 사람에게 용이하다

 

-시집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에서

 

 


 

 

<동시>

권지영 시인 / 아픈 말

 

 

누군가

탁 던진 말이

가슴을 꽝꽝 때릴 때가 있다.

 

망치로 잘못 친 못을

다시 빼내고 남은 자국처럼

 

잘못 던진 말은

어딘가 구멍을 남긴다.

 

ㅡ《동시 먹는 달팽이》 (2022, 여름호)

 

 


 

 

권지영 시인 / 모리셔스 가는 날

 

 

오전6시 오전9시 오후12시 오후3시 오후6시

째깍 째깍 시계가 그래프로 나열된다

-1도 3도 8도 11도 11도 우리보다 4시간이 느린 나라

인도양의 숨겨진 보석이라고 하지

이제는 직항으로 드러나 살아서 가는 천국이라고도 불린다

태평양 위에 떠있는 여기에서 인도양 위에 표류하듯 떠있는

그 섬나라까지 오르는 기온만큼 기다린다

연중 20도가 넘는 당신처럼 온화한 곳

기다림의 끝에는 20시간이 12시간으로 줄어들고

오래도록 홀로였던 우리의 시간도 줄어든다

나무껍질로 만든 파라솔 아래 아이보리 모래 해변에 앉아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는 우리

서로의 등을 덮는 석양에 파묻혀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으로 든다

알면 알수록 착한 당신 때문에 더 뜨거워지는 바다

끝을 알 수 없던 약속이 수많은 점으로 모여 수증기가 된다

오직 우리의 반짝임만을 담는 섬

죽어서라도 당신과 가닿을 머나먼 우리의 섬에서

두고 온 것들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

길고 긴 고백을 거두어들이는 마지막 작별과도 같은 사랑

헐벗고도 다 가지게 되는 희망의 섬이 기다린다

 

 


 

권지영 시인

1974년생 울산 출생. 경희대 국제한국언어문화학과에서 현대문학과 문화를 전공. 2015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 시집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 『붉은 재즈가 퍼지는 시간』 『누군가 두고 간 슬픔』과 동시집 『재주 많은 내 친구』 『방귀차가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