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정수 시인 / 통영랩소디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2. 08:00
박정수 시인 / 통영랩소디

박정수 시인 / 통영랩소디

-갈치 백반

 

 

무거운 갈치 상자 머리에 이고서

남평리 전역을 고래고래 떠돌다

어머니 파김치 되어

빈집으로 돌아왔네

부뚜막 쭈그려 앉아 생솔불 끄집어내

생살로 허물어진 상처에 소금 뿌려

뜨거운 불잉걸 위로

거침없이 올려졌네

뒵집는 손길마다 터지는 굳은 살결,

살아서 서러웠던 순간들 기억하며

어머니, 타오르는 불씨 속

젖은 생을 던져 넣었다

 

-《좋은시조》 2022. 여름호

 

 


 

 

박정수 시인 / 꽃팬티

 

 

오일장 난전에서

마구 피어난 꽃들을 보았다

꽃피는 청춘을 찾듯 쭈글쭈글해진 손들이

부끄러움 없이 만지작거리다

민망한 할아버지 슬며시 자리를 떠버린 뒤에도

낭창하게 피어있는 꽃팬티

장터 모퉁이가 환하다

할마시 걸음도 가벼워

활짝 핀 꽃팬티

 

친정집 서랍에서 본 적 있다.

낡은 서랍 안 가지런히 피어있던 꽃들

난전에서 따온 꽃이었구나

육남매가 단물 다 빨어먹은

쭈글쭈글해진 엉덩이가 들어앉을 꽃팬티

오일장 나들이엔 빵빵해진 엉덩이

실룩이며 대문을 들어선다

댕기머리 소녀가 속절없이 피어낸 꽃,

꽃팬티

탱탱한 엉덩이로 돌려줄 리 없는데

믿는다 칠순의 노모는

 

-시집 <봄의 절반 > 2010

 

 


 

 

박정수 시인 / 돌산대교를 바라보며

 

 

바다를 품은 도시가 그림처럼 펼쳐져

태양과 구름을 머무르게 하면

아득히 보이는 수평선은

한낮의 열기를 뿜어 해무를 드리우고

허공을 가르는 뱃고동 소리에

검푸른 바다로 떠나는 유람선이

파도의 잔상만 남기고 멀어져 갈 때

지나는 바람은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며

더러는 들물이 되고

더러는 날물이 되어

욕심 없는 세월에 몇천 년을 돌고 돌아

해풍을 타고 파도가 되어 찾아오고

석양의 노을도 황금빛 물결을 이루어

조각난 보석들로 빛의 향연을 펼치면

밖으로 꺼낸 추억들은 입가에 미소를 타고

파도 위에 머문다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갈매기 힘찬 날갯짓으로 손님 마중 나가고

태양이 그림자를 숨기며 산마루로 넘어가면

바다에 떠다니던 추억은 갈 길을 잃어 소멸된다

 

 


 

 

박정수 시인 / 우엉

 

 

흙 묻은 우엉을 사왔다

껍질을 벗기는데

친정엄마 까만 손톱이 보인다

살구나무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하루 품삯을 낡은 손가락으로 긁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냄새다

채칼에 밀려나간 엄마가

거실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창밖엔 눈 내리고

치맛자락 움켜진 계집아이의 손이

발갛게 얼어 있다

울컥, 차오르는 마당

깡마른 월남치마 자락에 감기던 향기

아이들 몰래 중얼중얼 엄마가 다녀갔다

 

- 시집 <봄의 절반>  2010

 

 


 

 

박정수 시인 / 교집합

 

 

아들의 유모차를 밀고 가는 아빠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오는 아들

 

 


 

 

박정수 시인 / 나팔꽃

 

 

홍씨가 장가를 간다

지금껏 쌓아온 것이 안일만은 아니었나보다

히죽히죽 치아가 샐 때마다 베트남 처녀가 얼비친다

서로 한 번씩 교환 방문을 하였으니

나머진 지참금과 그녀를 데려오는 날짜 뿐이다

오래도록 대역을 맡았던 면소재지 다방의 아가씨가 윤기를 잃고

넌짓 혀를 차던 친구의 내색이 사뭇 복잡해진다

마을을 지나쳐 물고 보러 가면서도

몇 개의 베트남 인사말을 중얼중얼 꼽아본다

그동안 그에게도 죽음의 고비가 두어 번 찾아들었다

무심코 장마통을 걸어가다

어깨 위 삽날에 가까운 곳의 벼락이 물신 파고드는 듯

그러나 그해 여름의 해프닝이었을 뿐

그를 논두렁에서 꺼내어주진 않았다

오늘 그곳에

한낮의 게으름을 밝히듯 나팔꽃이 논두렁을 건너고 있다

오랜만의 기쁨이 못내 어설픈지 한낮의 태양을 가로지를 땐

뭔가 알 수 없는 제 안의 현기증까지 내뱉는다

사십 초반의 홍씨가, 그 지루했던 논두렁길이 화색을 피워올린 것이다

 

 


 

 

박정수 시인 / 종이컵

 

 

그곳에 맑은 여백 한 자락 놓았습니다

 

끝끝내 뱉지 못한 고백을 담아 두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텅 빈 공허 속에 기다림을 담는 이유는

 

채워야 할 그 순간 어긋나는 일인지라

 

비우면 허망해지는 상실감 때문입니다

 

언젠가 단 한 번 용도로 버려지겠지만

 

한 사람을 오랫동안 기억한 눈빛만은

 

오롯이 타는 가슴에 안고 싶은 까닭입니다

 

-「좋은시조」(2022, 여름호)

 

 


 

 

박정수 시인 / 쇼파를 리폼하며

 

 

말없이 오랫동안 짓눌려 살았구나

 

팽팽한 탄력질의 근육은 빠져나가

 

맨살의 악어가죽만 질긴 세월 보냈구나

 

세상을 떠받치던 중압감을 덜어내고

 

갈수록 탄성 잃어 꺼져가는 함몰 앞에

 

낮아져 주저앉은 생애 복원력을 키운다

 

무너진 척추뼈를 일으켜 세운 하루,

 

쭈글해진 삶의 여백 충전재를 불어넣어

 

공기압 빠진 일상을 부풀어 올린다

 

-《좋은시조》 2022. 여름호

 

 


 

박정수 시인

1965년 경북 칠곡 출생. 본명: 박혜정. 2008년 《시작》을 통해 등단. 시집 『봄의 절반』.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제2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안성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