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시인 / 무지개 생명부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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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시인 / 무지개 생명부
벤치에 그늘이 앉아 있다
나는 그 그늘에 앉는다
특별한 그늘, 그러나 시한부 그늘,
창대했던 그 그늘 속에서
그리운 거 하나 없었는데,
그들은 점점
햇빛을 제 몸에 들이고 있다
그늘과 햇빛이 만드는 저,
무지개
이수영 시인 / 검은 사각형, 카지미르 말레비치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한기가 살을 뚫고 내장까지 어서 일어나, 무섭도록 서러운 말 머리는 끄덕이는데 따스했던 나무벤치도 시려 오는데 푸른 영혼, 그대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하산 길에 웬 종이배가 하얗게 앞을 막아선다 강을 만나지 못했구나 벌써 바다에 이르러 젖은 몸 말리고 있어야 할 이 시간에 푸른 영혼, 그대의 길은 어디로 통하는가
어허야, 학춤걸음으로 산을 내려 간다 2023년 계간 문학나무 여름호 발표
이수영 시인 / 벤틀리 S3 —베다니의 마리아 나의 초상 최은하
아드리아해 그물을 던지는 한 어부가 말한다
—내 피에 소금이 들어 있어요. 피 속에 소금이 들어간 사람은 바다를 떠날 수 없지요.
옳거니, 비로소 눈을 크게 뜨고 나의 피 속을 들여다본다 용솟음치는 피돌기 환한 그 한가운데 고즈넉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문지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빛 긴 머리채를 풀어 향유로 적시고 있는
네, 그 분의 발에 입을 맞춘 장본인 바로 저예요 베다니의 마리아예요.
이수영 시인 / 화폐개혁이랑 아버지랑
내 어릴 적 을지로5가 사거리 조흥은행에서
엄마는 제법 큰 돈다발을 주고
새파란 새 지폐 몇 덩어리를 받아들었다
무게와 부피에 관한 엄마의 산술적 설명
보다는 교환의 경이로움에 두 눈이 반짝거렸다
엄마, 아버지 말이에요
내 어린 날의 싱싱했던 아버지로 바꿔주세요
이수영 시인 / 볼보 -너의 눈이 호수 김춘희
파란 호수가 내 눈 안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은 아버지
―네 눈이 호수예요! 아,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시로 말했다 그렇게 시는 나를 향해 윙크하며 나와 놀자고 졸라댔다
-내 눈이 호수야! 아버지의 진심으로 나의 호수는 늘 잔잔했다 스스로 정화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온갖 생명들을 가슴에 안으며,
이수영 시인 / 제네시스 EQ900 3.8 -세계의 창 김종훈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 아버지처럼 든든한 무게감
누구라도 든든하게 기대고 싶다면 제네시스를 운전함이 옳다 묵묵히 감싸안는 침묵의 보살핌 끝내는 눈물보가 폭발해도 받아주고 또 받아준다 완전무결하게도 속 깊은 정
제네시스와 함께 날로 새롭게 열어간다 세계의 창.
이수영 시인 / 애도의 시간 내 영토가 사라져 간다 내 편이 떠나간다 뭉텅이뭉텅이 잘려나간다
더욱 홀가분해지기 위해 남아있는 것 가여운 것들을 버려야 산다
열차는 출발한다 몰약나무 잎새 향기로움 저편 미르 우주정거장 그 너머로
달항아리 눈물, 조요한 새벽
열차는 출발한다 기적을 울리면서 사람 마음빛 고운 날
달마의 시간 애도의 애도를 위한 시간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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