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성수 시인(서울) / 이별의 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2. 08:00
정성수 시인(서울) / 이별의 시

정성수 시인(서울) / 이별의 시

 

 

마지막 이별은

그렇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지

 

마치

최초의 사랑이 그렇게 날아왔듯이

 

우리들의 작은 지구별

손에 닿는 것 하나 없는 허공 속으로

어느 날 소리도 없이

가을날의 첫 낙엽이 지듯

 

혹은

아무도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는 새벽

우리들의 손가락처럼 빈 나뭇가지 사이로

어느새 겨울날의 첫눈이 내리듯이

 

마지막 사랑의 끝은

미처 슬퍼할 시간도 없이

생각할 시간도 없이

놀랄 시간도 없이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

 

우리들의 낮은 어깨를 슬며시 두드리는 것이지

 

마치

무심한 신의 손길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그렇게.................!

 

 


 

 

정성수 시인(서울) / 구두

 

 

갇혀 있습니다

네모난 흑백사진 속

한 켤레의 구두

 

하늘 한 자락 당기어

빈 속을 채우고 있습니다

 

바위 곁 한 무더기의 여뀌풀 잎새들이

허공을 기웃거리고

 

당신은 구두 한 짝 쥐고 앉아서

사라져 가는 물줄기를 내려다봅니다

 

소나무 숲과 작은 산들이

계엄군처럼 당신을 에워싸고

 

산자락 위에 걸린

흰 구름송이 몇 점

 

모였다간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소리없이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부활할 것인가

 

홀로 남은 당신의 이름을

불러낼 것인가.

 

 


 

 

정성수 시인(서울) / 죽은 자의 휘파람

 

 

그렇다, 먼 어느 날

오늘처럼 하늘 서슬 시퍼런 가을날

내 죽으면

푸르스름한 이내 낀 저녁을

바라보며

나직히 휘파람을 불고 싶다

 

부풀어오른 홍시가 야윈 가지 끝에서

내 붉은 심장처럼 땅 위로 떨어지고

어지러운 발자국이 떠돌던 마을

한 개의 단단한 씨앗을 묻을 때

 

질긴 모가지

소리없이 방바닥 위로 늘어지면

 

눈썹 끝이 다스운 봄날 오후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거닐며

이미 무거워진 바바리코트를 벗듯

망가진 육신을 지상에 내려놓고

 

투명한 영혼 하나 떠올라

잠시 낯선 생각에 잠겨

전쟁과 가난과 혁명의 시대를

슬픔과 기쁨으로 건너온

황인종 사나이의 껍질을 내려다보다가

 

죽음이란 이렇게도 가벼운 것이구나

내 찢어진 영혼의 집합체

그 중량을 저울질해 보다가

 

돌아가야 할 저 무명의 길

꽃잎 이우는 뒷모습을 조금씩 지우면서

 

산다는 것은

젊은 날의 유서 같은 것

 

가을바람 부는 허공 사이에 홀로 서서

나직히 휘파람을 불고 싶다.

 

 


 

 

정성수 시인(서울) / 눈맞춤

 

 

이글거리는 구공탄불 위에

간된장 뚝배기 하나 올려놓고

 

부엌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봄 하늘의 저녁별

바라보시는 어머니

 

저 깜박이는 몇 개의 별 속에

아물아물

무엇이 보이시나요?

 

자꾸만 무엇을

찾고 계시나요?

 

눈 들어 밤 하늘

끌어당겨 보아도

오직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별들의

운동뿐인데

 

어머니, 어머니

바다보다 생각이 깊은

어느 한 별에서

아버지의 푸른 눈길

 

아롱아롱 그리움 부풀리며

이승의 뜨락으로 내려오고 있나요?

 

추녀 끝 근처

어느 허공쯤에서

어머니의 젖은 눈빛과 마주치고 있나요?

 

 


 

 

정성수 시인(서울) / 낙엽은 왜 하염없이 지고 있느냐

 

 

낙엽은 왜 하염없이 지고 있느냐

이미 초겨울이 저 스스로 깊어가는 중인데

갈 길 잃은 눈발도 이리저리 흩날리는데

아직도 가을을 다 버리지 못하여

자꾸만 지고 있는 것이냐

 

눈 내리는 계절이 무거워서 지는 것이냐

가지 끝에 홀로 남는 것이 두려워 지는 것이냐

한세상 슬픔이 낭자하여 지는 것이냐

 

너는 왜 쉬지않고 지고 있느냐

봄날의 사랑도 가을날의 이별도

모두 다 사라져간 저 푸른 허공 속으로

너마저 왜 이렇게 하염없이 지고 있느냐…?

 


 

 

정성수 시인(서울) / 사랑하는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젊은 날의 내 죽음 슬퍼하지 마시라

 

지구 위에 산발한 나의 핏방울 위에

눈물겨운 무궁화꽃 송이송이 피어나나니

 

눈부신 적군 총칼 앞에서

누가 빛나는 돌격을 두려워하랴

 

사나이

사나이

초록 사나이들

 

어느 누가

저 뜨거운 청춘의 죽음을 두려워하랴

 

금수강산 대한민국

사자보다 씩씩한 북진통일

누가 두려워하랴.

 

 


 

 

정성수 시인(서울) / 젊음의 피

 

 

빠알간 피를 던져라

 

들끓는 경관들의 낯짝에다가

불붙는 피를 뿌려라

발길로 피를 차버려

산산조각으로

피의 안개를 세워라

 

그 속에 꿈을 꾸는 듯한

무지개를 태워라

 

최루탄을 도로집어

반대로 갈겨라

 

연기를 머금어라

연기를 뱉어라

피를 움켜잡으며 구호를 외쳐라

날뛰던 경관의 얼굴색이 변하게

 

몽둥이도 없이

총도 없이

최루탄도 없이

 

맨몸으로

 

몽둥이 삼아

총 삼아

최루탄 삼아

 

날아오는 것 받으며

끊임없이 달려라

 

분노 앞엔 모든 것이 굴복한다

얌전히 고개 숙여 항복하는 것들에게

 

소리 질러라

자유의 소리를

 

침을 던져라

쫓겨가는 독재자에게

 

먹구름이 일다

태양이 솟았다

 

드높은 하늘을 그대로 지녀라

피가 물든 넓은 태양

 

정열로 받아

가져라!

생각하라!

 

* 4.19 혁명시, 평택중학교 3학년

 

 


 

정성수 시인(서울)

1945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과 수료. 1979 '월간문학' 신인상 등단. 제3회 경기PEN문학대상, 학국시학상, 제1회 PEN문학활동상. 제2회 무궁화문학상 일반부 금상, 김우종문학상 대상. 제9회 이은상문학상 수상 등.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2019.~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