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아 시인(남원) / 위험한 노출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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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아 시인(남원) / 위험한 노출
할머니 뼈 갉아먹고 언제 내게로 옮겨왔는지 골반에서 신호를 보내온다 근원지 밝혀보려 엑스레이실 침대에 누워 생각해보니 늘어진 뱃살, 허벅지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드러난 내 몸 철심으로 박힌 내 뼈들이 대단해 보이는데 닮아진 골반 물렁뼈가 감나무에 걸린 연줄 같단다 눈금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뼈마디 경고 메시지를 보내느라 허연해졌을까? 거미줄도 바람 불면 흔들리는데 대낮부터 비틀대던 건넛집 돌배 아버지 간장에 췌장까지 노출한 뒤 이 태만에 세상 뜨고 의상실 옆 중학교 구선생도 생산 집 노출에 술렁술렁 소문만 자자하다 엊그제 세상 뜨고 아픔은 제 속에서 자라 무성한 노출을 낳고 화려한 열대 꽃이라도 심으려는지 따스한 피 돌고 도는 가슴 쓸어보는데 나도 몰래 뒤통수에 샛문하나 있었는지 오소소 실바람 새어들고
최정아 시인(남원) / 개미
내가 거느린 식구들 숫자를 모른다. 거짓말 같지만 그들이 거처도 모른다. 다만 몇 조각의 과일과 약간의 빵 부스러기를 준비해 둘 뿐. 늦은 봄날 밤비처럼 찾아와 성찬으로 배를 불리고 돌아가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다. 가끔 찾아오는 손님 앞에서 그들의 행적을 숨기기에 급급하던 내가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은 사소한 변화였다. 페르몬 같은 분비물이 어떤 농약보다 깨끗함을 알게 되고 그들의 출현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뒷방 어딘가에 서로 몸을 부비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들이 머무르는 방을 찾아내지 못하겠지만, 온기가 남아 있는 부뚜막에 밥 한 덩이 마련해두고 부엌을 나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최정아 시인(남원) / 풀벌레에게 주는 말
여보게 자네 날개 비비는 소리에 가을이 깊어 간다네 들녘의 알곡들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발에 밟히는 풀씨들도 으레 고개를 숙이는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 좀 보게나 칠흑같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빛나지 않던가 오래지 않아 자네 주변 감싸던 풀잎들도 서서히 돌아갈 텐데 거친 숨소리의 내 발자국 소리 들리지 않나 난 자네처럼 풍류를 즐길 여유가 없다네 둔치가 흔들릴 만큼 고음으로 노래하는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 오늘밤도 자네를 찾아왔지만 진정으로 충고 하겠네 자칫 그렇게 즐기다보면 맹목의 세월 보낸 나처럼 쫓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여보게! 자네 노랫소리 들리지 않으면 내 충고 기꺼이 받아들여 어디선가 열심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겠네
최정아 시인(남원) / 무죄
비는 내리고 두꺼비 한 마리 두 눈 깜빡이며 마당으로 기어 나왔다
엎드린 이마에서 빗물이 뚝뚝 들깨 모종 심던 엄마처럼 질퍽한 땅을 한발 한발 내디뎠다 곁눈질하면 금방 넘어질 것 같은 디딤돌 웅덩이 속 지렁이를 낚아채는 저 빠른 혓바닥 얼룩진 디딤돌에서 더운 김이 솟았다
“발에 흙 묻히지 않고 살면 얼매나 좋겠나” “아무렴 비가 뼛속까지 파고들겠나”
그 디딤돌 밟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던 나처럼 대밭 어디엔가 분명 귀가 뻥 뚫린 새끼들이 있을 것이다
청보리 잎 같은 비 오래도록 내리고 간간이 들려오던 산꿩 울음도 사라지고 문득 앞산의 나무들 속옷까지 벗어던진 날이다.
최정아 시인(남원) / 깡통에 소리새가 산다
캔 뚜껑을 따는 순간 날갯짓이다. 밀봉의 힘으로 소리가 날았다. 저녁노을에 깃털을 물들이는 새처럼 가끔 누군가의 손을 물고 핏빛으로 날았다. 발길에 찌그러지면 부러진 다리로 다시 일어나는 새 새는 죽어서도 새가 된다는 전설을 믿는 눈치다. 몇 번이나 바닥을 구르며 빈속에 품은 공기는 버리지 않았다. 구둣발로 차일 때면 재활용센터 합숙하는 새가 부럽기도 했다. 냅다 발에 밟혀 찌그러진 뒤에도 햇빛을 받아 반짝여야 한다는 것. 부러진 가지 끝에 매달린 풋열매 같지만 소리는 깡통의 힘 텅 빈 속 더 크게 울려야 한다. 다시 태어날 때까지 소리를 놓지 않을 것이다.
최정아 시인(남원) / 바람의 세공
창문이 덜컹거립니다 꽃사과나무 아래 앉았던 바람이 무릎을 폅니다 일을 시작하려나 봅니다 두들기고, 당기고, 점점 거칠어지는 풀무질 소리 계절의 첫 자락이 팽팽해집니다 내 머리카락마저 세공하려는 바람의 손길에 끌려 나는 꽃 사과나무 아래 앉아봅니다 꽃피는 봄날 온다던 엄마는 바람이 여물어도 돌아오지 않고 그동안 써놓은 이력서가 뿌리처럼 깊습니다 오래된 기억을 마저 다듬어봅니다 불린 쌀에는 밥물이 얼마 배추 몇 포기면 소금이 얼마 내가 그동안 세공한 내용들입니다 경력란에는 죽어 썩어질 몸이라고 일러 준대로 적었는데 엄마는 썩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죽은 척 꿈쩍 않던 꽃사과나무가 바람이 걸어준 보석을 뽐내며 살아나듯 말입니다 당기고 두들겨 빚은 오색 빛깔이 내 몸 곳곳에서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최정아 시인(남원) / 소∙9
어깨에 걸린 가방에서 송아지 소리가 들린다. 젖떼기 무섭게 멀리 보낸 그 송아지 울음이다.
비오는 날 흠뻑 들이킨 물, 한동안 심했던 갈증에 부풀대로 부풀었다.
죽어서도 끌려 다니는 짐승, 세상이 무덤 같아 밤마다 뜬 눈이다.
뿔을 반으로 갈라 불에 굽고, 얇게 깎아 문양을 새긴 화각장, 봉황이나 연꽃으로 환생한 소뿔에 인고의 발톱자국이 숨어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쏟아져 내리는 햇살도 잘게 쪼개어 삼켜두었어야만 했다. 뛰쳐나가고 싶을 때마다 뿔을 세워 허공을 힘껏 들이받아야 했다.
죽어서도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떤다.
극장으로 숨어들어 해리포터 죽음의 성물에 몸을 맡겼다. 마법의 나라에서는 내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악마와 싸워 이기는 방법은 간단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용기를 내는 것, 악마의 뱀이 내 앞에서 죽었다. 불이 켜지는 순간 내가 큰 짐승이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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