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이정 시인 / 방아쇠수지증후군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2. 08:00
박이정 시인 / 방아쇠수지증후군

박이정 시인 / 방아쇠수지증후군

 

 

하늘에 떠 있는 홍옥 한 알

빌딩 뒤로 사라지자

차들이 헤드라이트 붉은 사과 열리는

사과도시를 지나간다

한 알의 사과 한 그루의 사과나무 한 뙈기의 사과밭

한 집단의 사과마을

과수원도시 심장부 사과도로를

몰래 훔치는 CCTV가

사과주차장이 된 교통방송을 실시간 조작 편집한다

사과체증을 유감으로 체화시키는

사과의 나라

위층 새댁이 몇 번 쪼개본 경험이 있는 사과

꿀진심 담긴 사과 한번 먹고 싶어

옆 동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고 나가

한번 쪼개본 사과

왕복팔차선 길 건너 사과카페 총각은

한입 베어 문 덩어리에 목이 졸려

숨 막혀봤다는 사과

사과 없는 사과로 꽉 찬 사과나라

사과 한 알의 무게도 겨우 들어야 하는 나는

사과환자

쪼갤 엄두도 못 낸다

 

 


 

 

박이정 시인 / 고등어高登魚

 

 

등지느러미 쫙 편 듯 산능선 나무들

등 푸른 구름 배경 앞에 서 있다

나뭇가지 지느러미를 살랑거리며

바다를 유영하듯

치어 떼가 검푸른 해초 사이로 다닌다

 

태평양 상어세슘떼 피해

등 푸른 물고기구름들

떼 지어

푸른 하늘 헤엄치고 있다

 

집단이주 한 걸까

하늘을 오르는

高登魚

 

김약연*처럼

 

*구한말 리더, 식민치하, 굶주린 회령 주민들 이끌고 두만강 넘어 북간도에 정착, 명동소학교, 명동교회 세워 안중근 홍범도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수많은 독립투사를 길러낸 교육자, 철학자.

 

 


 

 

박이정 시인 / 몸을 찢다

 

 

매미 한 마리 어둠의 촉수를 건드린다

 

어둠이 몸을 찢는다

혼자 운다

어둠을 삼킨다

문이란 문을 모두 열어젖힌다

순식간에

천구의 지붕이 날아간다

 

날개돋은 오토바이

어둠을 뚫고

매미 날개 그물망에 걸린 신경회로를 지나간다

 

발뿌리로 지구를 움켜 쥔

새벽 나무

가지 위로

날아오른다

 

부릉 맴 부름 맴 엔진이 타는 독백들

이마에 붉은 구름 발자국 남기고

우주 끝을 돌아와 파닥거린다

 

솟구치는 해

심연의 바다를 찢고

젖은 날개 불을 당긴다

 

 


 

 

박이정 시인 / 살구

 

 

이름 호명된 살구들이 새벽 노동시장으로 발걸음을 굴린다

 

야생 살구 한 알

멸종위기의 눈알 굴리며 나살구 너살구 편도선이 붓는다

시간 맞춰 들어간

새벽 일터

선잠 깬 목청을 찢으며

망치를 두드린다

 

쪼갤 듯 부숴버릴 듯 또 한 번 천둥이 다녀간 뒤

어떤 살구는 번개가 뻗어나간 쪽으로 굴러가고 있다

 

우르릉 쾅쾅 살구가 쏟아진다

 

먹구름 손끝에 목덜미를 잡힌 늙은 살구나무

고부라진 무릎 아래를 못 떠나는 살구를

허공에 내던진다

 

현 위치를 가늠 못 한 채

이름 불려지길 기다리다

잠깐 나타난 빛을 따라 굴러가는 살구

차바퀴에 으스러지는 살구

눈알 굴리며 쓰레기 더미에 처박히는 살구

살구죽구죽구살구 비에 젖고 있다

 

 


 

 

박이정 시인 / 모자가 있던 자리

 

 

서울-부안 행 버스 안

 

-낭구*가 없으니까 정말 심심해-

 

홀연히 한 줄 말이 내 옆 빈자리에 앉는다

 

내내 각 진ㄴ字로 앉아있는 자리

 

눈빛으로 부안 들녘 바람을 빨아당긴다

초록실뱀 동진강변에서 조병갑은 만석보를 쌓고

분단의 한반도 시인들은 각기 시단(詩壇)을 쌓고

녹두꽃은 파랑새를 날리고

그는 수평선을 베고 누워있다가 무덤을 열고 나와

비석으로 서 있다

(의미는 썩고……여기 내 껍데기를 보아라!)느낌표를 퉤!뱉는다*

 

-사실 나는 시단의 전봉준이 되고 싶었어-

 

전교실*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신’이라는 글자에서 작심이라도 한 듯

‘ㄴ’을 벗고

'시'가 되어

먼 묵언수행길 떠났다

 

간 밤 내 꿈에서 활짝 웃던 그의 회색모자 푹 눌러 쓴

빈자리에 푸른 바람이 일렁인다

 

*오남구의 시‘느낌표’차용.

*전교실:천도교의 예배당.

 

 


 

 

박이정 시인 / 세한도

 

 

언어의 환영幻影에 홀려 불시착한 유배지에서

내가 나를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려놓고

산산이 부서지도록

 

내가

내 몸을 닦고

내 몸을 조이고

내 몸을 기름칠 하면서

내 몸의 흙

내 몸의 물

내 몸의 불

내 몸의 바람을

차례 차례 빼내고 있다

 

가시울타리에 위리안치 된

기계의 부속품

폭설에 묻힌다

 

폭설주의보 내린

세한의 아침

사람을 눈처럼 굴리는 손이 다가와

폭설에 덮인 나를

감상한다

 

골수까지 텅 텅 비어가는

하루하루

객지의 여인숙 찌든 벽 액자에서

늙은 소나무가 팔 길게 뻗어

폭설 속 나를 꺼낸다

뜨끈한 구들장에 들여놓고

잠든 나를 내려다본다

 

 


 

 

박이정 시인 / 구안와사 걸린 벚나무

 

 

이젤찻집 이층 창밖 봄바람이

캔버스에 벚꽃잎을 토한다

유리 탁자에 비친

벚나무 얼굴에 화르르르~~~~

 

유리탁자에 놓인 찻잔

맑은 녹차 물속 일렁이는 얼굴에서 파닥거리는

나비 한 마리

긴 부리 뻗어 꽃잎 헤치며

찻잔 손잡이에 살폿 앉는다

 

창밖은 벚나무의

잔혹한 현실

 

가차 없이 속말을 토해버린 날

새로 들어선 높은 건물이

굵은 가지 삼차신경을 꽉 막아

안면마비증 앓고 있다

 

꽃잎모자이크 된 자화상

유리액자에 끼워 이젤에 세워놓고

일당백 봄바람이 나비를 날려

나무를 옮기고 있다

 

 


 

박이정 시인

2006년 《다층》으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민족문학연구회 회원. <시산맥> 특별회원. 시향동인, 다층동인, 한국하이퍼시클럽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