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영 시인 / 가엘에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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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시인 / 가엘에게
반대라는 말이 좋아 나는 이렇게 쓰고 커피를 마셨다 그 반대는 뭐지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혹은 커피를 만들었다 나는 북반구에서 살고 있다 가엘은 남반구에서 죽어 간다고 생각한다 커피를 마실수록 어두워지는 얼굴이 좋다 살아간다와 죽어 간다는 어째서 같아지는가 내가 늙어 가는 동안 가엘은 어려진다 손을 뻗어 커피 열매를 딴다 반대라는 말은 정확하다 나는 가엘에게 편지를 써서 땅에 묻었다 안녕 나는 침대 밑의 남반구야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내가 잠든 동안 가엘은 반대편에서 노동을 시작한다 그곳에도 버즘나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일어나면 거꾸로 된 별자리를 세며 가엘은 나를 가엾게 여긴다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몇 그루의 가로수를 지나쳐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가엘은 한밤중을 열고 내 꿈으로 들어와 반대말 놀이를 한다 바다의 반대는 하늘이야 산이야 나의 반대는 너야 우리야 나는 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편지를 쓸 수 있다 적도의 반대는 어디일까 북극과 남극은 반대가 맞을까 매미 울음소리의 틈으로 제 목소리를 끼워 넣어 한여름의 페이지를 넘기는 귀뚜라미가 거기도 있을까 내가 당신에게서 돌아선 게 사랑의 반대였을까, 가엘
김건영 시인 / 내생의 폭력 내 생의 폭력은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티베트 망명지에서 수용소를 탈출한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안에서 무엇이 가장 두려웠어요 그는 말했다 나를 고문한 사람을 미워할까 두려웠습니다 나아가 모든 중국인을 미워할까 두려웠습니다 마음속에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마음이 남아서 마음을 죽이려다 차가운 손에 화상을 입은 사람을 보았다 고기를 구웠다 나는 고기를 좋아합니다 누군가 이것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나는 먹고 마시고 말한다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리가 퍼진다 미안하다는 말입니다 고기에는 귀가 없다 나는 망명지가 없었다 되찾아야 할 나라도 없었다 사는 연습을 어디서 할 수 있는가 내생의 폭력은 현생에 준비되어 있다 물과 공기가 있는 것처럼 신을 비난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나는 사람의 말로 신의 말로를 쓴다 죽어 가는 태양과 죽어 가는 별들이 있고 여전히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저 이미 죽은 자를 가름끈으로 쓰고 있을 분입니다 신이 없다면, 신을 비난하는 것이 신이 나에게 준 사명이다 나는 많은 것을 사랑하기 위해 저주를 생각한다 사람보다 신을 미워하는 일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우리는 다음 생에 만나서 더 많은 잘못을 해야 한다
김건영 시인 / 나 홀로그램 집에
집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 아래에도 집이 있고 사람이 있 다 공중에 있는 집은 비싸, 누군가 말했다 머릿속에서 산다는 게 뭐지 물으면 산다는 건 집을 사는 거지 집을 대신 살아주는 거야 집은 발이 없으니까 발 없는 집이 천 리를 간다던데요 그래서 저는 머릿속에 집을 넣고 삽니다 모두가 집을 사랑하니까 다들 집도착증에 걸렸잖아 누구나 집으로 돌아가 집 없는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가 집에서 울지 그러나 집에는 항상 누군가 있고 그건 주인이다 집 요하다는 말은 떠오르고 가라앉는다 집은 사람보다 비싸니까 싼 건 입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집은 사람보다 단단하니까 새는 집을 어디에나 지어요 본인을 새에 비유하시는 건가요 그런 말에 부끄러워진다 제가 날기에는 좀 무겁죠 하고 웃으며 어떻게 사람이 사람 위에서 먹고 마십니까 공기를 마십니까 아무거나 새로 만드는 이야기가 낫지요
김건영 시인 / 수피
나무를 칼로 찌르던 남자를 알고 있다 찌르다 찌르다 나무가 된 남자를 알고 있다
공중을 긁던 손가락이 있었지 피가 흐르는 저녁은 왔다 이 밤에 어딜 가니, 발목을 넣어 둔 옷장을 열 때면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지에 앉고 싶어
나이 든 무희들이 사는 골목을 알고 있다 전생이 나무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기 위해 무릎을 숨기고 사는 무희들 죽은 소의 혀처럼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지 내가 너를 실망시켰니 너를 실망 시켰니
나는 붙들어도 괜찮아 식물적 광란으로 바위를 움켜쥐고 부서뜨리는 거야 춤을 회복하는 거야 잎을 벗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면 너는, 별에 붙어 구르는 가루일 뿐이지
꽃들이 부서져 날리는 봄이야 사람들은 허공을 자르기 위해 창문을 만들었다 네 속의 활자들을 중력이 가다듬어준 것처럼 비명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지
나는 종종 식물들에게 듣는다 몸 속에 관이 들어 있는 기분은 어떠니 물을 빨아들이는 나무 속의 짐승, 뿌리 속의 턱뼈, 내 사랑니 속의 승냥이들은 아직 살아 있는지
방 안에 남아 있는 너의 가지들을 연결할 수는 없겠지 안녕과 악령을 같이 발음한다 도끼로 몸속을 저며 종이를 만들어 볼까, 수피
김건영 시인 / 그리고 어떤 사슴들도 슬픔은 핥지 않았다
나무는 자라서 집이 된다는데 새들이 찾아오지 말라고 목매단 새들을 걸어 놓은 걸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에 사람을 이끌어 경고하기도 한다고 어디에서 들었더라 목이 막혀서 기억이 덜컥거린다
집보다 사람이 더 싸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은 왜 하는 거야 무너지는 게 있어서 그래요 무너지는 게
깊은 숲속에 소금을 핥으러 다닌다는 사슴이 우리나라에 있나 나비도 소금이 필요하다는 걸 백과에서 읽었다
암염(巖鹽)이라, 기억나지 않는 기억만큼 단단한 게 또 있을까 암염(暗炎)이라 그래 숲속은 어둡지 빛나는 눈이 보이면 짐승이 있다는 말이지 동물이 좋아 곤충이 좋아 어쨌든 우리 사람은 아니잖아
눈을 감고 들어가 보면 전세(傳貰)가 보인다
저 집은 어떻게 지었을까 높고 깊은 곳에 지은 집을 보며 말하는 사람이 있다 돌을 이고 지고 거기까지 갔을까 집을 이고 가지는 못했을 테니 집은 무겁고 비싸 무겁고 비싸다 그러니 사람은 절벽을 이고 동물적으로 가벼워져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 사슴들이 달려와 냄새를 맡고 고개를 젓는다 눈물 같은 닭똥이네
김건영 시인 / 층계참
층계참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층계참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슬픔을 곱씹는다 비밀의 끈을 풀어내거나 분노한다 층의 국경은 너무 가까워서 전서구를 날릴 수 없다 층계참에 사는 사람을 보려면 층계참에 가야 한다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차면 슬픈 일이 일어난다 계단의 중간은 비어 있고 덫을 놓고 사람을 기다린다 누군가 먼저 와 있다면 자신만의 층계참을 찾아가야 한다 멈춰 서서 여기에 없는 사람과 여기에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영원히 잠시간 머물 수 있는 층계참 적당한 더위와 추위가 있는 도래지 아무도 비를 맞을 수 없지만 어쩐지 모두 젖어 있다 펜도 없이 편지를 쓰고 공기 속에 놓고 간다 투명해질 때까지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층계참이 좋다 반쪽이 된 사람들이 나머지를 잊고 서 있다 출구가 너무 많고 공공연히 비밀을 말할 수 있다 층계참에 오래 서 있으면 모르는 사람들을 배웅할 수 있다 지나치게 배부르거나 지나치게 배고픈 자들이 오르고 내린다 지나친다 아무도 숨지 않는 층계참에는 귀신도 머물지 않는다
김건영 시인 /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나무들
그때 신은 너무 어려서 많은 실수를 했다 차마 불태울 수는 없어서 잊어버린 일기장처럼 남겨진 사람들은 그때부터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죄의 이름들이 밤하늘에 가득 떠올랐고 금기는 선분처럼 자유로웠다 지붕 없이는 잠들 수 없게 되었다
걸어 다니는 나무들과 한없이 우는 물고기들 알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다음 생에 수림의 일부가 되기 위해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벌레를 죽이면 벌레가 된대요 그러면 신을 죽여야겠구나 사람이 되고 싶으면 사람을 죽이고 나는 이 세상이 무서우니 더 무서운 사람이 될 거야 내가 아프니 세계도 아파야 한다 착한 사람들이 잘하는 건 사라지는 일이다 더 착한 사람들만 남겨두고 우리는 책과 지폐를 맞바꾸고 원인보다 결과를 반대로 말한다 그 사이에 언제나 나무들이 병정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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