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시인 / 투어리스트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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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시인 / 투어리스트 너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아 말하는 그의 뒤에 검은 물체가 일렁인다 몸이 죽어도 정신은 남는다 그의 말투를 따라 하다가 내가 되어버렸다 그에게 키워지느라 그를 버려야만 했다 그를 묻은 숲이 사라지면 그가 완성될 것이다 구름이 구름을 구경하고 강아지풀이 강아지풀을 만든다 나는 죽어간다 죽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웃으며 경쾌한 발소리로 사라져갔다 그들이 한번씩 발을 빠뜨렸던 호수는 아직 있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잔잔한 호수 이 몸은 몇번째 몸일까
이종민 시인 / 기념
창문에 드는 햇빛에 눈을 뜹니다. 오전 열한 시. 집 앞을 유치원생들이 지나갑니다. 옆 사람 손을 꼭 잡고 따라와야 해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요. 간밤에 한번 끓여놓은 미역국을 놓고 늦은 아침을 먹습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숟가락을 들면 묻고 싶습니다. 창밖에 새벽 비가 마르고 있습니다. 회색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검고 작은 물 자국이 군데군데 찍혀 있을 거고요. 국물에 마지막 한 톨까지 긁어 먹으면 해가 중천입니다. 설거지 마치고 빨래 탁탁 털어 베란다로 가져가면 유치원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보여요. 옆 사람 손을 꼭 잡고 선생님을 따라서. 작은 발자국이 희미합니다. 빨래는 잘 마르는 중입니다. 방에는 아직 개지 않은 이불이 펴져 있고요. 한 명도 빠짐없이 아이들이 유치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집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에서
이종민 시인 / 너의 꿈은 내가 갖고 싶었던 가장 아름다운 그림자
묻지 않은 것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세계는 빛의 세계 생각하는 몸은 생각처럼 있고 생각 없음으로 오롯한 정신
식도를 넘어가는 커피 검은 액체가 흰 액체가 되어 나온다
고장난 걸까 우리는 어둠으로 가는 중인데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잊으려 들지 말자
헐게 조여진 바퀴 양쪽 모양이 다른 새의 날개
외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이름에 대해
무너지고 뒹구는 몸은 무엇에 대한 대답인가
빛이 있으라 그러면 그늘을 볼 수 있다 분절과 영원
이종민 시인 / 작은 방주
물위에 떠있는 배보다 지면을 딛고 있는 배의 미래가 더 많다
많은 게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확실한 한가지보다 불확실한 여러 가지를 더 좋아해
커다란 새장 속 새가 날고 있다 우리가 처음 손을 잡는다
스미스가 좋아하는 한옥 앞에서 영희가 좋아하는 양옥을 상상하면서
스잔 땅거미가 지는데 오 수지큐 같은 가사를 떠올리고
정이란 많은 것보단 얼마나 따뜻하냐가 더 중요한 것
편하게 해 편하게
나는 운전을 좋아하고 금연껌 보다는 졸음껌이 더 맛이 없지만 사람들은 적당히 불편한 것에 더 매력을 가집니다
속이 다 보이는 새장과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낌이 좋은 조형물
잠시 한 배를 탄 것뿐이야 서서히 물이 차오르면 각자의 목적지가 생기지만 영원히 모르면서 좋아하는
웹진 『주파수』 2022년 11월호 발표
이종민 시인 / 히메
너는 우연히 읽은 계절을 닮은 문장 너를 생각하면 죄를 짓는 기분
너는 구멍 난 배에 철판을 덧댄 부분 녹슨 가운데 가장 빛나는 언젠가 벌어질 틈을 두드리는 바다의 꾸준함
나는 스스로 단두대에 목을 대고도 겸연쩍어하는 목회자 나는 짐승의 썩는 시체 수풀 속에서 숨을 고르다가 수풀 속에서 발견되지 못할
봄에 비를 말할게 비를 봄에 말하면 봄이 비를 부단히 만나면 그리움
처마에 맺히는 찰나를 모아서 몸을 씻을게 상처에서 피가 나다가 더 이상 나지 않을 때까지 사랑에 빠지다가 지옥의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 앙상한 몸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여름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가을을 들추지 않을게 폭설 속 한기와 습기를 모두 담아서 줄게
불, 인생의 전부이자 아무것도 아닌 그렇게 너는 말했다
이 이상 너를 말하지 않을게 한파주의보에 떨어지는 솔방울처럼 인내를 자랑삼지 않고 홑몸을 핑계로 너를 누더기처럼 기워 입지 않고
월간 『현대시』 2023년 7월호 발표
이종민 시인 / 육화
사랑은 서로를 사육하는 것 품속의 무늬를 서로에게 서서히 덧칠하는 것
당신이 문을 열 때 달아나는 오후의 대기 속으로 스며드는 빛의 잔흔 걸음 사이에 꼭 맞춰 울리는 심장 고동
별 밤의 먹이
출구가 없는 통로에서 환승역을 찾는 조급함으로 꼭 아침으로만 나가야 하지 않는 꿈의 방식으로
당신이 불행의 눈꺼풀을 베개에 비빌 때 태어나는 새들의 지저귐
무성하고 헛된 생육이 하나의 접시 위에 올려진다 투명한 유리는 반짝이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실내는 자신의 의지로 풍랑주의보를 발효하기로 했습니다
사랑은 속이 빈 상자 안에서 결국 또 다른 상자를 찾아내는 것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포장지를 어렵게 뜯어내는 것
계간 『애지』 2023년 가을호 발표
이종민 시인 / 트랙
스탠드에 혼자 앉아 있었다 콩주머니 하나가 운동장에 있었다
가을이 지나갔다 던진 것과 놓친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번의 가을이 더 지났다 멀리 온 두 손에 콩 주머니가 쥐어져 있다
운동장에는 발자국이 너무 많고 머리 위로 만국기가 펄럭인다
몇 번을 봐도 못 외우는 나라 이름이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계속 거기 살고 있었는데
스탠드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끔 발자국의 주인을 생각하면서
이종민 시인 / 주인은 힘이 세다
그 집은 비어 있다 주인은 잠시 떠났다 주인 없는 집에서 주인 있는 옷이 마르고 있다 양말에 달라붙는 건 체모다 주인의 체모와 주인이 아는 사람의 체모다 주인이 돌아다니다가 묻혀 온 체모와 주인이 아는 사람에게 딸려 온 체모도 있다 그 집에는 아무도 없다 주인도 주인이 아는 사람도 모르는 흔적이 있다 그 집은 조용하다 조용한 그 집에는 수많은 체모와 덜 마른 옷가지와 이불의 구겨진 무늬가 있다 나는 그 집을 본다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름이 생긴다 얼굴이 생긴다 사방에서 주인이 오고 있다 내일을 끌고서 수많은 방을 끌고서
-시집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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