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선정 시인 / 어떤 결혼식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3. 08:00
이선정 시인 / 어떤 결혼식

이선정 시인 / 어떤 결혼식

 

 

다리를 저는 아비가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의 손을 잡고 걷는다

 

넘어지던 세상을 일으켜주던

아비의 걸음이 신랑 앞에 멈추고

 

넘어지지마라

절룩이지 마라

 

자신의 소망을 그의 손에 꼬옥 쥐어준다

절던 다리의 고정핀 하나가 건너간다

 

팔랑,

지구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간다

 

 


 

 

이선정 시인 / 문득

 

 

문득

그 옛날 어느 모텔 방에서

흘리고 온 스카프처럼

사소하고도 아릿한 기억

 

문득

우연히 올라탄 버스에서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처럼

잊은 줄 알았던 존재들의 희미한 낙인

 

문득

하루의 마침표들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어둠에 들어, 웅크렸던 불면의 밤만 골라

무의식중에 입혀진 허름한 옷

 

문득

문득의 틈새로는

늘 그렇게

불현듯 꽃 지고 눈 내린다

 

 


 

 

이선정 시인 / 슬픔에 노크하는 것들, 봄이라는 이름의 봄

 

 

눈치 없는 것들을 우리는 봄이라 하자

 

가령, 고여 있는 슬픔의 웅덩이에

매화꽃 한 잎이 천연덕스럽게 날아든다

차가운 온도에 주춤하다가

파르르 향기로운 눈웃음을 짓는다

 

겨울 동안 제 몸 찔러 썩고 패인

악취 나는 죽음의 무덤 속에

그 작고 연약한 분홍의 몸짓이라니

미세한 점 하나가 부풀어 이내 봄이라니

 

한 잎의 매화가 봄을 풀어놓고 잠든 자리

 

웅덩이를 훌쩍 타넘고 가는 노랑 원복의 꼬맹이들

눈치 없이 내 우울보다 더 크게 튀어 오르는 개구리 떼들

초상집에 섞이지 않는 화려한 옷을 걸친

초록의 군상들이 토독토독 눈치 없이 달려온다

 

내 슬픔을 모른 채 거미줄을 걷어내며

말갛게 달려오는 모든 것,

슬픔에 노크하는 곡진한 것들,

 

우리는 그것을 봄이라 하자

 

울다가 처진 입술을

개나리 통꽃같이 동그랗게 오므려

 

'봄'

이라고 부르자

 

 


 

 

이선정 시인 / 쓸쓸

 

 

해지기 직전의 곳들은 쓸쓸하다

 

오늘이라는 생애를 전속력으로 태우던

일몰의 잔해가

시뻘겋게 도로위를 굴러다닐 때의 시간은 쓸쓸하다

 

작은 알곡 튼실이 익히려

땅의 젖줄 양껏 빨아대던 논두렁이

반쪽씩 대머리가 벗겨져 일몰아래

널브러져 있는 저녁이 평화로워서 쓸쓸하다

 

어느 구멍으로 찾아 드는지도 모를

달리는 것들의 꽁무니가

무작정 속도를 내어 쓸쓸하다

 

세상 모든 쓸쓸한 것들의 뼈마디를 돌아

겨울로 가는 바람의 한숨이

서걱서걱 어두워져 쓸쓸하다

 

쓸쓸의 꼭짓점 위에

외발로 서 있는 너.나. 우리

 

아. 젠장맞을 그 쓸쓸

 

 


 

 

이선정 시인 / 구두에 대한 예의

 

 

삶의 부제를 벗어던진 그들이

오소소 잠든 현관

 

-꽃길만 걷자 해놓고

흙길만 걷게 해 미안하다

 

내 낡은 구두 앞에서 목도하다가

멀리서 힘없이 잠든 말라빠진

구두 한 켤레에 울컥 목이 멘다

 

-어머니,

당신은 더 힘드셨군요

 

삐딱하게 목이 늘어진

구두 한 켤레

 

깨지 않도록

가지런히 잠자리를 보아 드린다

 

 


 

 

이선정 시인 / 애인 나누기

애인의 원조는 누구일까?

허공의 출처는 어디일까?

그 수많은 뼈와 수많은 모자와 수많은 여우와 사과

봄은 고양이 까망 얼룩 고양이 누군가 반복적으로

던진 고양이 입속의 시 야옹, 나비? 아니 장미

우리는 발견을 나누는 애인

감정과 감성을 베끼는 연인

어제는 당신의 애인이었다가 오늘은 나만의 애인

서로의 애인을 나누는 애인

새를 죽이고 죽은 새를 묻고 천변이나 사막을

수시로 걷다가 이쯤에서 눈을 감았다 뜰까?

은밀한 교환은 없어 밀폐를 언박싱하고 새로운

알몸을 발표하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한번 쓰윽 훑고

우리는 단번에 필요한 애인을 알아보지

빛의 속도로 갈아 끼울 애인을 골라

-너무 나이브 해

교수님은 입에 달고 살았지

오브제가 화려할수록 나누기 싫은데

! 이런, 조심하렴

당신의 소중한 애인이

어느새 내 몸에 꽂혀있을지도 몰라

웹진 시인광장202310월호 발표

 


 

이선정 시인

​강원도 동해 출생.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수료. 2016년 『문학광장』 등단. 2020년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23년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계간 『동안』 편집위원. 안목 동인. 시집 『치킨의 마지막 설법』, 『고래, 5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