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수일 시인 / 노파의 새장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3. 08:00
최수일 시인 / 노파의 새장

최수일 시인 / 노파의 새장

 

어두컴컴한 반지하 방

작은 창 쇠창살에

얼굴을 바짝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 노파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에는

어떤 서러움 같은 게 그렁그렁 맺혀 있다

방안엔 허공을 나는

아픈 날갯짓 소리가 가득했다

 

매화꽃 향기 그윽한, 푸른 숲에 당도하기 위하여

그녀의 날개는 수없이 창공을 유영하는 연습을 한다

 

새의 발톱이 착지하는 공간 속으로, 나는 먼저 도착한다

푸른 숲은 알몸으로

그녀의 마른 기침소리를 복제한다

콜록, 콜록 콜록 새의 노래소리가 숲에서 춤을 춘다

 

일류대학이라는 철창에 갇혀

서랍 속에

처박아 둬야 했던, 어느 봄밤

충혈된 시의 눈동자

 

오래 전 떠난, 소년시절의 망각의 뒤뜰에서

나는, 그 새의 맨발을 다시 만난다

언뜻,

낡은 새장에 갇혀 있는

부리가 상하고

날개가 찢긴 새 한 마리 본다

 

 


 

 

최수일 시인 / 빨래집게

 

 

연립주택 옥상 빨랫줄의 빨래집게

아기의 속옷가지를 말릴 때는

새끼 원숭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장난을 치듯

한 손으로 빨랫줄에 매달리는 여유를 부렸고

청바지같이 무겁고 잘 마르지 않는 빨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떤 때는

203호 아가씨의 손바닥만 한 팬티를

물고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고

505호 막일하는 김 씨의 낡은 운동화의 발냄새도 잘 참아냈다

무겁고 커다란 이불을 널어야 할 때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일은 홀로 감당해야 했다

비 오는 날은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고

바람 부는 날은 일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바둥대기도 했다 어쩌다

한가한 날에는 창공을 우러러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잊고 지냈던 지난 꿈들을

한두 마씩 끊어 너울너울 날려보냈다

어느 때부턴가

물고 늘어지는 힘이 슬슬 빠져나가고 겨우

빨랫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한 생애

빨랫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던

앙다문 이빨 사이로 선홍빛 피가 비치곤 했다

 

<두레문학>2022제32호

 

 


 

 

최수일 시인 / 논밥

 

민둥산 군데군데 푸른 구름이 몽실몽실 내려앉는다

오리목, 떡갈나무그루터기에 돋아나는 새순이다

 

초록을 한 아름씩 베어 와서

무논에

듬성듬성 흩어 뿌리는 할아버지

 

이맘때는 논도 배가 고프다며

이랴, 소 몰아

쟁기질로 논밥을 골고루 비빈다

 

쟁깃날 스칠 때마다

논바닥이

꾸르륵 꾸르륵

빈 배 채우는 소리를 내고 덩달아

쑥꾹 쑥꾹 쑥쑤꾹,

이제 갓 돌아온 쑥꾹새가

이 산 저 산 날아돌며

허기진 울음 토해낸다

 

쑥꾹새도

논도

나도 자주 허기졌었다

 

내 유년의 5월이 다시 돌아왔다

 

 


 

 

최수일 시인 / 접목(椄木)

 

 

봄 햇살을 끌어당겨

몸을 덥히기 시작하는 고욤나무, 그 밑동을 들여다본다

낫으로 싹둑 고욤나무 줄기를 자르는 할아버지 손에 햇살이 고인다

 

윗동이 잘려나간 곳에 금세

송공송골 맺히는 이슬 같은 체액

 

일찍이 호미산 비탈밭 지킴이가 된

젊은 아내,

그녀의 깊은 샘에 고이던

옥수(玉水)를 닮은

 

밑동아리의 면을 다듬고 쪼개려

슬며시 때깨칼을 가져다 댄다

 

움찔, 몸을 움츠리는 나무의 아랫도리

감나무 가지를 잘라 만든 접가지를

쪼개진 곳에 슬쩍 찔러넣는다

바르르 몸을 떠는 밑동

 

어설프기만 했던

첫 경험을 떠올리며 잠시

아청빛 허공을 올려다보며

열없는 웃음을 날린다

 

접순을 품고 있는 대목(臺木)을

봄기운과 지푸라기를 섞어 갠 진흙으로

꼼꼼히 감싸 바르고

잠든 아내를 이불로 여며주듯이

짚 이엉으로 살며시 감싸준다

 

-『두레문학』 2023년 33호

 

 


 

 

최수일 시인 / 대야에 담긴 가을

 

 

팥 녹두 귀리 같은 잡곡을 담은

조그마한 플라스틱 대야들이

재래시장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치

 

몰래 장난치다 불려 나와

교실 한쪽 구석에

풀 죽은 보릿자루처럼 꿇어앉은 악동들처럼

자습시간에

책걸상 위를 거침없이 날아다니다

반장에게 이름 적혀

교실 앞쪽으로 불려 나온 장난꾸러기들

 

콩 콩 콩……

교실 마룻장에 무릎을 꿇고

장난질 정도에 따라

콩 팥 조 수수 귀리 기장 옥수수 녹두 순으로

매 맞을 순번을 기다린다

 

종아리 걷고 돌아서!

 

고요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교실 안에

옥수수알처럼 탱글탱글한 종아리에서

팥 팥 팥……

마른 옥수숫대 회초리 소리가 난다

 

늦가을 햇살이 꼼지락거리는

플라스틱 대야에서

톡 톡 톡 참깨 깍지가 터지고

수수수수 수수밭에 참새떼 날아오른다

 

-『착각의시학』 2023. 겨울호

 

 


 

최수일 시인

경북 김천 출생.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졸업. 호서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2021. 『시사문단』 시 등단. 제18회 풀잎문학상 시 부문 대상. 한국바이오플랜트(주) 감사. 호서대학교 교수 역임. 유케이(주) 대표이사. 코오롱 글로벌(주) 전무이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