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시인 / 흰 부추꽃으로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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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시인 / 흰 부추꽃으로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게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박남준 시인 / 국수
한때 언제 국수 먹게 해 주냐는 말 무수히 들었다 그 말에 날 잔뜩 세우기도 했다 국수 먹게 해주냐는 말 점점 무심해졌다 국수 먹게 해주냐는 말 점점 듣지 않았다 국수 좋아한다 국수 장사하자는 소리 그럭저럭 간간하고 심심치 않게 들었다 후루룩~~나 한 국수 한다 국수, 스님을 미소 짓게 한다고 승소라 부른다는 그 스님도 내가 끓인 국수 먹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 내 국수 참 많이도 먹었다
박남준 시인 / 산에 드는 시간
1 쓸쓸하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하여 피워 올린 오랜날들의 그리움이 그 기다림이 이윽고 깊어진다는 것이다
2 오래 기다려 본 약속이 있다 오래 기다리게 했던 사랑도 있었다 뜨거워지는 것에 목숨을 걸으리라 그런 시절이 있었다
3 마음의 평화와 고요로부터 오는 아침을 생각한다 그 길 위에 번민의 고난이 별빛과 달빛과 맑은 햇살의 노래가 오고 갔다
4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흔들린다 작고 가벼워져야 비로소 낡은 시간을 안고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 흐를 수 있는 것
5 거기도 첫눈 내리느냐 너를 향한 설렘과 그리움이 두 눈 가득 함박눈, 첫눈을 부른다
6 벗어났다 갇혀 있었던 것이다 갇혀 있었다고? 머물렀던 것이다 머물렀다고? 사랑이 떠나간 것이다
7 너 때문에 별이 반짝인다 초롱꽃이 피었다 너 때문이다
8 고정되어 있으면 희미하다 들어오지 않는다 앞의 너머 그 뒤쪽에도 비틀거리고 흔들리며 나지막이 독백하는 것이 있다 애써 침묵하는 것이 있다 악을 쓰는 것이 있다 고요한 것이 있다
9 그대 안에 일어나고 스러지며 흘러가는 순간들 내 안의 앞뜰과 뒤뜰 파문과 파문과 고요와 고요와
10 마음이 자라서 불러냈다 덥고 춥고 꽃피는 것 사랑 때문이다 변덕 같은 사랑을 탓해라
11 사랑 그렸다 지운다 지운 자리에 쓴다 가닿을 수 없는가 가닿고도 남을 간절함으로 그리운 얼굴을 아픈 이름을
12 너를 잊었다 마음에 되뇌었다 이쯤에서 내 고통스러운 사랑은 거두기로 한다
13 옛날이 불편하다 이 버릇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습관이 자주 옛날을 꺼내 본다
14 자라난 상심이 유리창에 가 닿으며 성에를 키운다 입김을 불어 손가락에 지워지는 성에처럼 상처도 지워지는 것이라면
15 어떻다 어떻다 내게도 저런 허물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그렇지 나 또한 맞장구를 치지 않았는가
16 순한 나물을 먹고 순한 생각을 하고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고추를 먹고 맵고 독한 생각을 하고
17 예순 넘어 드는 생각 너그러워지기를 가까이하고 가까워져야 스스로를 경계하고 참으로 겸손해져야 하는데
18 보보공부步步工夫요 처처도량處處道場이라 그래 내딛는 걸음걸음이 공부요 머무는 곳곳이 깨달음의 도량, 공부방이다 나 지금 어디에 머무느냐 어디를 걷고 있느냐
19 문밖의 저 생명은 어디서 왔나 내 안에 우주가 건너온 시간을 들여다보는 오늘 입춘 아침 다시 또 매화꽃을 보여 주시는군요 비우지 못하고 갇혀 허덕이고 있는데
20 낮은 돌담 너머 감나무 붉은 꽃등을 내건 가을을 걷는다 탐한다 나지막한 탄성이 발길을 멈추고 풍경을 더듬는다
햇살들 익어 가는 꽃같은 나날 내 탐은 꽃 건너 구름의 창을 열고 하늘거리는 속살까지도 더듬거려 가는데
21 너 어디다가 주먹질이냐 갓난아기가 주먹을 쥐고 있다 착하지 손펴봐 앵 하고 부르니 초초초 어라 금세 뒤따라 나오네 앵초꽃이 피었다
22 요란하게 오셨구나 개울물 불었다 빗속에도 밤새 환하다 여겼더니 꽃등을 내걸고 있었느냐 누군가의 깊고 어두운 창에도 세상의 슬픔과 고통 곁에도 환하고 따뜻한 불 밝혀 거는 사랑 있으리 뜰 앞에 초롱꽃이 피었네 아직은 불 밝히고 있으라고 그리워하라고 마음의 붉고 곧은 심지에 등불 켜 있는가 초롱초롱초롱꽃이 피는 나날
23 아랫집 강아지가 시끄럽다 사슬 때문이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줄에 묶여 있는가 포기하고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기까지 은발의 머리칼을 갖게 되기까지
24 놀라워라 작은 꽃눈이 견뎌 낸 시간이라니 겨울을 건너온 모란이 봄날을 물들인다
아침이 빗방울을 뿌리고 갔나 또르르 또르릉 모란이 싱그럽다 내 안에 붉은 키스가 들어오네 물든다 마디마디 감긴다 향기로부터 행복이 오다니
25 간밤 별똥별 여기 떨어졌네 보랏빛 도라지꽃등을 밝혔다 네 눈 속에 뜬 꽃 한 송이 생각하는 밤 내 마음의 창에도 별이 가득 떠오르네
26 하루살이가 하릉 하릉 길가에 몰려나와 떼거리로 난다 나 또한 마디마다의 시간 속에 바등바등 얼마나 하루를 목매었나
27 방전이 다 된 기계로 몰리는 그런 시간이 있다 마른 풀섶에 주저앉은 낙엽처럼 풀썩 빠져나간 혼을 바로 붙잡아 와야 한다 오래 나가 있으면 증세가 위험하다 움직여야지 빨래 널었다 사람들 왔다갔다 깔고 덮은 자리 누가 왔다갔나 이부자리 자욱한 여기저기 발자국 말간 햇볕을 뿌리고 채워 놓았네
28 물결은 모래톱을 씻겨 주려고 찰랑촐랑거리고 강가 대숲에 바람이 불자 새들이 댓가지에 앉아 그네를 타네 서그럭 사그락 찌그덕 끼르륵 물결은 일고 바람은 춤추네 새들은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외줄을 타듯 곡예를 하네
29 산달래꽃 저 꽃봉오리를 언제 열까 기다리는 시간 사이 그리움이 깊다 봐라 멀리서도 사랑은 향기롭지 않은가
30 싱그러운가 풋풋한 것들 밀려오는 초록이 눈부셔서 못 견디겠는가 아침 봄날 속에서 누가 부른다 잎새들 뒤쪽 작은 종소리가 숨어 있다
은방울꽃 은방울꽃이
31 너를 기다리는 동안 꽃이 피고 너를 기다리는 동안 별은 반짝이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새는 노래하고 너를 기다리는 동안 강물이 범람하고 알고 있니 사랑으로 온통 차오르는 시간인 너를 기다리는 동안
32 항아리에 담겨 익어 가고 있다 상처의 시간을 건너서 풋내 나던 차 향기가 무심해지기까지 고개 숙여지기까지 산다는 것 강이 되어 강물로 흐르며 강을 내려놓는 일이네
박남준 시인 / 수국
여름 뜨락에 쪽빛 물방울무늬 치마가 서 있다 한자락 바람이 슬쩍 스며 못내 수작 건네는데 속없이 웃네 푸른 잇속이 흔들릴 때마다 파도치는 파 르 릉 내 몸에 번져 물들이네 파란을 일으키는 풍경이 휘~청이네
박남준 시인 / 작은 나무
높은 산이기를 바란 적 없었네 산이라면 산맥을 이루며 서로의 어깨를 두르고 바다를 향해 달리는 앞산 옆산 작은 산이라면 하고 수줍은 흰 종이에 그려 보기는 했으나 언덕이라면 좋겠네 지친 등 기대어 줄 낮은 언덕이라면 그 언덕 위 아름드리 소나무나 느타나무 아니어도 새들의 노래 들려주며 바람의 춤을 추는, 따뜻하고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는 작은 나무이기를 바란 적 있었네
박남준 시인 /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불시착의 연속에 있었다 바오밥나무들이 점등을 하는 비상활주로의 길 끝에 사막은 시작되었다 사막이 공간 이동으로 뛰어든 이유는 불시작의 그 처음이 발단이었다는 정도로 생략하겠다 그리하여 그리움이 사막을 메아리쳤다
파상공세를 퍼붓는 풀들에 쫓겨 앞마당에 왕마사를 깔고부터였다 사락사막 발자국 소리마다 사막이 전염되어 불려 나왔다. 불시착한 철새들의 울음이 묻혀 있었다 홍고린엘스 노래하는 모래산이라는 남고비사막의 첫 밤처럼 저녁이 드리워지고 곧 하늘이 모자라게 별들이 뜰 것이므로 나는 보드카와 방랑의 담요를 두르고 사막의 밤으로 누울 것이다
밤하늘에는 불시착을 한 채 이별에서 살아온 시간이 상영될 것이다 오 새드무비~ 서툰 배역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고통스러웠다 잔기침쟁이 장미와 사막여우처럼 길고양이 룰랄라도 충분히 길들여진 채 이별의 적응기를 끝냈으므로 나를 떠나갔다하여 염려하지 않기로 한다 돌아갈 시간이 머지않다는 것을 안다 엔딩 자막이 올라오며 점멸하는 활주로에 꽃을 피우지 못해 울던 사구아로 선인장의 곡성이 화면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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