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옥 시인 / 광화문 광장에서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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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옥 시인 / 광화문 광장에서
칼 한 자루 든 충무공 동상 아래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눈앞에서 죽어 가는 자식을 보며 아무 것 할 수 없던 천막 속에서 굶기만 하는 만신창이들 그 마음 달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 흰 천막 몇 개는 명령을 기다리는 명량해전의 패잔선 같다
수많은 적선이 진을 친 울돌목 한 목숨 더 구하기 위해 배 벽을 높이고 물에 적신 솜이불로 총알을 막아냈지만 어린 목숨들의 죽음에 이제 그는 광장의 찬 바닥에서 잠드는 이들의 울음만 내려다 본다
거센 물결치는 광화문에서 천막의 함포가 쏘아대는 노란 리본들 찢어져 너덜거리는 신문고와 산자들의 상처를 파고드는 악성루머 대형 간판만 펄럭이는 언론사와 일대 골목마다 탄알처럼 장전된 어린 경찰들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만이 명량의 회오리 물살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박인옥 시인 / 날개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아마츄어 고고학자 사우투올라의 어린 딸이 발견했다 비좁은 굴에서 무심코 본 벽화에는 석기 시대의 붉은 들소 수십 마리가 거세게 뛰고 있다 내 가슴에 얼굴 부비며 어디든 따라 다니는 막내딸은 날아다니는 새를 보다가 나는 왜 날개가 없느냐며 큰 소리로 울곤 했다 그때마다 너는 날마다 내 마음 속을 날아다닌다고 나의 컴컴한 동굴 속 어디쯤에서 수만 마리 새들과 날고 있다고 달랬다 불빛을 비추면 어느 원시의 벽화 속 새들이 나타나고 거짓말처럼 너는 나의 한 마리 어여쁜 새라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어린 새의 연한 주둥이 같이 따닥따닥 종알거리는 너를 보면 숨겨왔던 내 날개가 자꾸 푸드덕거린다
박인옥 시인 / 헤마다온 봄바람의 말
원죄같은 건 따지지말자 하늘빛깔 따라서 칙칙하게도 맑게도 계절은 왔다가 떠난다 맥박처럼 소리없이 먼지입자로 쌓이는 일상이 빚는죄 법조문으로 다스려지는 표나는 것일 뿐 사소한 것은 뭘로 다스리라 온몸의 털구멍이 입을 열어 흐느끼는 속죄의 시간 파란 어둠이 내려 쇠창살이 되는 밤 지친 다리가 백열등 아래서 경련 일며 떤다 결국 죄이리라 이뇨제를 복용해야 배설되는 하루가 바람에 날리고 닳아지는 신발 창만큼 가볍게 떠돈다
박인옥 시인 / 아이들의 나무
나무에 이는 바람 소리가 있었네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네 나는 사라진 나무를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렸네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게 하라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나무가 없네 황량함이 아이들의 장난감이고 절망이 아이들의 게임이네 아이들이 올라갈 곳은 혼란뿐이네
- 영화 <녹색카드> 중에서
박인옥 시인 /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게 하라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가서 세상을 본다. 단단한 가지를 찾고 걸터앉아 스스로 중심 잡는 법을 배우고, 다리를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나무 잎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투명함을 마음에 옮기기도 한다. 바람의 말을 들을 줄 알게 되고, 잎새 뒷면의 길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럴 때 나무는 꿈이고, 쉼이고, 친구이다.
나는 나의 다섯 아이들을 키우며 그들이 오를, 나무를 찾는 시간에 함께 하려 애썼다. 아이들은 몰두했다. 자신의 나무를 찾는 일은 중요하고,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사각 교실, 각진 학원 건물 아래 깔린 나무들의 신음은 아이들이 편히 뒹굴고 안길 가정으로도 스며들었다. 그럴 때면 작은 사람들의 세계도 신음을 했다. 자신의 나무가 베어진 것을 발견한 아이는 그 깊은 상처에 갇혀버렸다.
나의 아이들이 올라 세상을 보고, 자신의 세계를 둥지 지을 나무를 찾았을 때 나는,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나무가, 하늘이 박혀있는 잎새 사이, 바람의 문 가까이에 아이들을 데려다줄 거라고 믿었다. 늘 우리에게 하늘이 묻어있고, 우리가 겪는 바람의 시작과 끝이 있음을 아는 것, 그 온전한 마음이 그들이 오르는 나무에서 비롯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무는 마음의 중심이고, 가슴의 논리일 것이다.
늘 아이들의 세계가 잎새처럼 반짝이며 무성하기를 바랐다.
박인옥 시인 / 작별
어머니는 정말로 다 견뎌냈다
아프다 슬프다 보고 싶다 말을 이제 나으려 이런다, 곧 좋아지려나 보다
말끝에 위안을 달고 웃었다
위안은 여리고 금세 시들지만 물리치료사의 손을 거쳐 한 번씩 불끈, 못쓰게 된 다리를 들어 올리기도 했다
유난히 눈이 반짝였다 꽃을 보면 더 밝아지던 눈빛을 위해
시골 길가에 당신의 웃음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들국화를 들판을 들길을
나는 어머니가 꽃이 아닌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왜 꽃이 아닌 날이 없었을까만
다리를 잃고서는 휠체어가 있어서 허리를 잃고서는 이렇게 좋은 요양원에 보내주어 고맙다며 또 꽃이 되었다. 나는 봄부터 마당에 달맞이꽃을 기르고 있었다. 노란 꽃잎 마주칠 때마다 달맞이가 어머니 얼굴을 괴고 흔들거렸다
그러다 오늘 아침에 화단의 달맞이와 세상의 모든 꽃은 온전히 어머니가 되었다,
달맞이는 돌돌 말고 있던 헌 다리를 툭 떨어뜨리고 마치 피지 않았던 것처럼
초록 잎만 활짝 열어둔 채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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